그저 그런 일상

시험 후유증
아직 완전히 시험이 끝난 것은 아니지만 일요일 본 시험의 여파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때이른 춘곤증으로 고생중이며, 오수가 필요하다고 중얼거리는 나를 발견할 때마다 잠은 한층 심하게 쏟아진다. 아무래도 오늘 저녁에는 모든 것을 차제하고 잠부터 자야할 모양이다.

채점 결과는 약간 실망이었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실수가 많았다. 그렇다고 기분 나쁠 정도로 엉망인 점수는 아니지만 나답지 않은 실수와 오류가 마음을 심란하게 만든다. 몰라서 틀린 것은 용서할 수 있지만 알면서 틀린 것은 용서가 안된다. 조금 더 차분하게 문제를 직시했더라면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조금 더 냉정했더라면, 머리 속에 저장된 정보를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했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긴 이 시험은 만점을 맞기 위한 시험이 아니라 남보다 잘 보기만 하면되는 시험이다. 들어난 약점은 남은 3주 동안 채워 넣으면 된다. 머리속에 정보가 없는 것이 아니라 단지 효율적으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나의 가장 큰 죄라면 실망하긴 너무 빠르고 포기하기는 너무 아깝다. 그러니 즐거운 마음으로 나에게 주어진 이 작은 전투를 이겨내는 수 밖에 없다.

노트북 입고
지난 이년 동안 내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던 iBook를 입고 시켰다. 백라이트 케이블에 생긴 이상으로 포터블 디바이스 주제에 데스크탑처럼 나를 불편하게 만든 것을 봄이 되기 전에 고쳐놓기로 마음 먹었기 때문이다. 사실 케이블에 생긴 이상으로 잠자기 모드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그러나 노트북이 없는 하루는 왠지 이상했다. 무엇을 하던 항상 옆에서 나를 도와주던 충실한 친구가 사라진 기분이다. 수리점에서는 2주 안에 고쳐질 거라고, 최대한 빨리 수리를 끝내겠다고 말했지만 내심으로는 시험이 끝날 때까지는 고쳐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충실한 친구도 멀리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지금이 그렇다.

도서 구매
마무리용 문제집 4권과 두 권의 소설을 샀다. 현재 문제집 재고는 5권. 경우에 따라 1권을 더 살지도 모르겠다. 권당 500페이지 내외, 하루에 150페이지 이상을 풀어야 한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별로 힘들 것도 없다. 무언가를 하는 동안에는 또 다시 시간의 흐름을 잃고 몰입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강팍함이 아닌 스스로에 대한 믿음일지도 모른다. 3주쯤 고생스런 길을 걸으면 생겨날지도 모르는 믿음 말이다.

임프리마투르와 곤두박질이란 소설을 샀다. 사실 옥스포드운하 살인사건과 Exile과 핑거포스트도 사들이고 싶었는데 문제집의 대출혈로 포기했다. 아무래도 봄이 되면 모든 것을 잊고 소설의 세계에 빠져들지도 모르겠다. 살만 루시디의 하룬과 바다의 이야기도 출간되었고, 한니발 시리즈가 완역되었다.

개인적으로 이 시리즈는 내용에 비해 디자인이 엉망이다. 한니발이 최초로 출간되었을 당시 아마존에서의 열기를 생각해보면 현재의 디자인은 결코 마음에 들지 않는다. 화려한 장정은 입지 않더라도 판타지 소설처럼 보이는 이 조잡한 표지는 정말 분위기가 없다. 개인적으로 선뜻 사들일 수 없게 만드는 그 무엇이 존재하다. 이런 책들을 사서 읽는 나같은 이상한 기호의 사람들에게 책은 내용뿐만 아니라 표면의 미학적 가치도 꽤나 중요하다. 겉보다 내용이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틴에이저들의 통속 소설같은 표지를 입은 책을 책장에 꼽아 넣기란, 그것을 용납하기 어렵다구.

난데 없는 서점 순례
시공사에서는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미국사가 나왔다. 발췌독 결과 옥스포드 미국사보다 낫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앙드레 모로아의 미국사보다 약간 더 섬세했다. 다만 이 책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미국사의 사전 지식이 필요하다. 섬세하지만 완결성과 이행성이 떨어지는 구조적 결함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결점에도 불구하고 자금 사정이 나아지면 바로 사들일 책이 될 것 같다. 무엇보다도 다른 학술적인 책들에 비해 금융 문제에 대한 디테일이 많이 삽입되었고, 누가 뭐래도 현대인들이 미국사를 읽는 이유는 철학과 정신을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경제사로서의 미국의 성장을 주목하기 위해서이다. 갤브레이스와 챈들러의 저술에 대한 보조서로 제일 적당한 책일 듯 싶다.

파노프스키와 뒤러을 보러 갔다가 우연히 해석도상학이란 책을 발견했다. 두 권을 비교해보자면 재미는 전자가 내용의 깊이는 후자 쪽에 있다. 물론 여건이 허락하는 한 두 권을 모두 읽을 예정이지만 후자쪽이 더 끌린다. 한가지 부연할 것은 해석도상학에 대한 관심은 절대 다빈치 코드의 영향이 아니다. 옛날부터 관심있었던 영역인데 단지 시간이 없었을 따름이다. 하지만 지금도 그 시간이 언제쯤에나 생길지는 모르겠다. 사다 놓으면 누님이 좋아할 거라는 생각에 꼼꼼하게 살펴본 책. 그런데 요즘은 먹물의 상진이 기호학자에서 도상학자로의 변신인 것일까? 랭던도 그렇고, 곤두박질의 클레이(정확하게는 부인인 케이트)도 그렇고 실제로는 매우 드문 직업 중 하나일 도상학자가 세상에 넘쳐난다.

임페리움과 로마공화정, 로마황제라는 세 권의 책은 고민 그 자체다. 조각상과 화보의 압박은 후자쪽인데 전자에서 다루는 시대의 폭이 더 넓다. 내용은 둘 다 개론서 수준. 사실 엄격하게 따져보면 임페리움의 도판도 꽤나 화려하다. 이래 저래 예산선의 존재기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내용면에서는 임페리움쪽에 조금은 더 후한 점수를 줄 수 있을 것 같다. 발췌독 결과 태반이 한번쯤 읽어 본 이야기였지만 이 책들은 수집가의 본능을 자극한다. 우선 임페리움을 먼저 사들이고, 두 권은 도서 상품권과 적립 포인트를 활용할 계획. 불만이 있다면 공화정과 황제정을 분리할 것이 아니라 합본으로 만들 것이지 하는 좀스런 생각이 잠시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 두 권은 왠지 사람을 고민스럽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신문사에서 갈고 닦은 내 편집 기술과 이론에 위반되는 그 화면 구성에 짜증이 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반이상 읽어보고 구매 여부를 결정해야 할 듯 싶다.

마지막으로 다빈치의 유산과 미켈란젤로가 나왔다. 다빈치를 다룬 책 가운데에서는 이만한 두께와 열의가 느껴지는 책을 여태 보지 못했다. 아니 이 책에 대한 소개는 바로 그 책이다라는 한 마디로 충분하다. 사실 다빈치가 언급되는 책의 대부분은 이 책에 큰 빚을 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켈란젤로의 경우에는 예전에 나온 소설과 비교되는 점이 많았고, 무엇보다 가볍지 않은 절도 있는 문체가 읽기 편했다. 다빈치의 유산은 정말 본격적으로 달려들지 않은 이상 쉽게 완독하지 못할 것이 뻔히 보이 터라 이번 여름부터나 읽을 듯 싶다.

그런데 생각의 나무에서 나온 라루스 서양 미술사는 어떤 책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마 이 시점에서 내 체력은 바닥난 모양이다. 피로감을 느낀 나는 까페 베로나만 사들고 눈 내린 고속도로를 따라 귀가를 서둘렀다. 얼어붙은 고속도로가 주는 공포를 느끼며 이유는 모르지만 핸드폰을 꼭 붙잡고 있었다. 불안감 속에 슈베르트의 리트를 들었고 굴드의 Goldberg 변주곡도 들었으며, 눈오는 기념으로 녀석에게 안부도 물어 보았다. 그렇게 월요일이 지났고 또 한 주가 흘렀다.

참. 이번 시즌에 나온 경제 경영서는 정말 엉망이었다. 의무감에서 아무리 찾아보아도 이거다 싶은 책이 없는 이 현실은 무엇인지.

2 thoughts on “그저 그런 일상”

  1. 고시신문을 읽어보니 문제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는데 다들 시간이 부족했다고 하더군요. 마지막 한달이 중요한 변수라고 하니 힘내세요!
    간만에 포스팅이셔서 기쁘게 읽었는데 덕분에 좋은책 정보 많이 얻어가네요. 저도 어서 틀을 잡아 딴생각할 시간에 독서로 머리를 식힐수 있으면 좋겠네요.

  2. 그런데 제 경우에는 정말 당황스러울 정도로 시간이 많이 남았어요. 대충 한시간 약간 못되게 남더라구요. 아무리 시간이 남아도 절대 검토는 하지 않는다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지켜온 원칙에 다시 한번 충실했는데 채점 결과는 아주 약간 실망스럽네요.

    너무 쉽게 풀어서 기대 수준이 올라간 모양입니다. 무엇보다도 나중에 채점하면서 평소와 다르게 페이스를 잃고 흥분했다는 사실을 발견한 뒤로는(머리속의 지식을 활용하지 않고 성급하게 단편적으로 분석했거든요) 스스로에게 궁시렁 거리고 있는 중이예요. 투우사에게 돌격하는 소처럼 아둔했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거든요.

    책에 대한 이야기는 서지 정보도 꼼꼼하게 살펴보지 못했고, 대충 올 봄에 읽어야 겠다고 마음 먹은 책들의 목록쯤으로 생각하면서 썼어요. 이렇게라도 남겨두지 않으면 시간 속에서 묻힐까 저어되서요. 19살 수능을 남겨두고 대학가서 무엇을 해야지 하는 마음과 너무 비슷한 마음이어서 꽤나 놀랐답니다.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