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fore Sunset#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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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기본적인 생존권마저 위협 받는 시험 기간에, 그것도 없는 시간을 쪼개 걸어준 전화가 반가웠지만 애써 내색은 하지 않았다. 사실 녀석의 전화를 받았을 때 난 졸음과 사투 중이었고, 누군가와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한참 수업을 듣고 있을 친구 녀석들이 원망스러웠고 졸음을 유발하는 나른한 햇볕이 싫었다.

<공부는 잘 되어 가나?>
<응… 그럭저럭 이제 뭔가 보이기 시작했어. 넌 어때?>
<나야. 뭐. 여항 말로 토하기 일보 직전이야. 밤새고 나면 울렁거리는 그 기분 있잖아. 내 상태가 딱 그거야>
<도와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 동네에서는 내가 할 줄 아는 것이 없다>
<(한참 웃었다) 세상에서 제일 하기 싫은 일이라 경영쪽으로 가겠다고 하던 것이 누군데? 넌 하얀 가운보다는 지금이 더 어울려.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해야 건강하다니까>

한동안 할 말이 없었다. 지난 봄에 약속하고 지키지 못한 일들이 생각나 양심이 찔렸다.
<왜 말이 없어. 나한테 죄지은 것이라고 있나 보다.>
지은 죄가 너무 많았다. 지키지 못한 사소한 약속부터, 지킬 수 없게 된 또 다른 약속까지
<죄는. 내 양심은 약수에 넣어도 가라앉지를 않아>
<시험 끝나면 Before Sunset보러 가자. 22일 개봉이라니까. 시월의 마지막 저녁도 괜찮고…>
비포 선셋이라. 너하고 비포 선셋을 보는 것은 너무 위험해. 간신히 삶이 주는 소소한 즐거움들을 외면하기 시작했단 말이야. 그러다 다시 살아나면….
<사진보니 말랐더라. 맛있는 것 좀 뽀지게 먹고 다녀>
<어이구. 너도 그런 말 쓸 줄 알았나. 그나저나 싸이는 언제 시작한 거야?>

그렇게 대답을 넘겼다. 완곡한 거절의 의미라는 사실은 우리 둘 다 안다. 하지만 미안한 마음은 감출 수 없다. 내년에는 말이야. 네가 원하는 대로 뭐든지 해줄게. 밤을 지새워 달라면 지새워 주고, 여행을 가자면 같이 갈게.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흔들리고 집착하며, 번뇌하고 싶지 않아._M#]
나이듦을 애석해 하다
아침 나절부터 음식 장만을 돕고 있었다. 화양전을 만드는 동안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비디오 플레이어에 비포 선셋을 밀어 넣었다. 텔레비젼 화면을 주시하며 주변을 둘러 본다. 막내 누이뿐이다. 결국 비포 선셋을 누이와 보게 되는구나란 생각에 쓴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둔감함과 무지로 무장한 뭇녀석들과 같이 보는 것보다는 그래도 누이가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 우리는 같은 세대이며 비슷한 감성을 소유하고 있으며, 어느 한 사람의 몰이해로 상처받지 않아도 되는 사이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영화를 누이가 아닌 다른 사람과 보았더라면 그것은 꽤나 위험한 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객관성을 유지하지 못한채 기분에 빠져들었을지도 모르고, 타인의 감상에 상처받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느끼는 이 기분을 그녀가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 사이에 놓인 거리를 다시 인식할지도 모르겠다. 비포 선셋은 그런 영화다.

9년 동안 에단 호크도 늙었고, 누이 말처럼 줄피 델피의 몸매도 죽었으며, 나도, 누이도 모두 늙었다. 이제는 로맨틱한 사랑보다 현실적인 이야기에 공감 한다. 쉽게 말해 사랑에 몸이 달아오른 그 누구도 없다. 자연스럽고, 편한 분위기, 우리는 그들에게 완벽한 공감을 표하며, 그들에게서 지나온 과거의 내력을 읽어낸다. 살면서 혹은 사랑하면서 한번쯤 경험했던 대화와 표정들. 비포 선셋을 보는 동안 생각나는 것들이다.

아니 에단과 줄리를 보면서 내 삶에 쌓인 시간의 두께를 절감한다. 그녀를 만난다면 나 역시 에단과 같이 말하겠지. I am so sorry. 여전히 그대로인 마음을 담담한 듯 말하며 상대에게 부담이 되지 않도록 농담과 진담을 모호하게 섞어가며 그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들이 어떤 사정으로 만나지 못한 것처럼 과거와 같은 열의와 정열로 확신을 말하지 못하는 것 또한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림처럼

비포 센셋을 보다 보면 익숙한 장면에 놀라곤 한다. 어디선가 본 듯한 구도와 장면, 유심히 기억을 되집어 보게 된다. 하지만 이내 익숙한 장면이지만 현실에서 몸으로 직접 겪은 장면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림이구나. 파리의 풍경을 담은 수많은 그림들을 인덱스가 형성되며 영화 속 한 장면과 그림을 매치시킨다. 감독이 의도한 효과인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인지 구분하기 어렵지만 머리속에 담긴 그림은 영화에 대한 이해를 높인다.

그림을 보면서 느꼈던 감정이 고스란히 영화로 옮겨진다. 에단과 줄리의 쉴새 없는 대화만큼이나 배경은 많은 것들을 전달한다. 실사의 화면 속에서 대화를 나누던 주인공들은 이내 그림 속에서 움직인다. 보이는 것은 유화 물감의 덧칠이 입혀진 캔버스이고 들리는 것은 어쩌면 미래의 내가 그녀와 나눌지도 모를 대화다. 시간은 역전되고 정지한다. 어느 것 하나 분명한 것은 없지만 그것이 현실이며 내 삶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느껴진다. 현실적이어서 마음 아프고, 아름답지 않지만, 또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아름다우며 공감하는 영화. 비포 선셋이 그렇다.

사실 이번에도 감독은 결론을 말해주지 않는다. 제시는 비행기를 탔을 수도 있고, 타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쩌면 지난 9년 동안 그들은 서로의 뒷모습을 수 없이 바라봤을지도 모르고, 다른 상대에게서 상대방을 발견했다고 착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꿈이 단순한 꿈이 아니라 그들의 염원일지도 모르며, 9년 전 하룻밤은 그저 하룻밤에 불과했다는 결정을 내릴지도 모른다.

제시가 말한 농담과 진담 가운데 어디까지를 믿어야 할지. 셀린느의 삶 속에 어디까지가 내숭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진 않다. 이 영화는 그들의 이야기이되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들이 어떤 결론을 내리던 우리에게는 우리 삶의 결론이 있으며 우리가 살아온 방식으로 결론을 내리면 된다. 다만 다시 9년 후에 영화가 만들어진다면 현실적이면서도 행복한 그들로 그려졌으면 좋겠다. 내 삶이 행복하기를 염원하듯이.
781234.pdf

2 thoughts on “Before Sunset#2”

  1. 오랜만에 찾은 너의 홈피다.
    그 동안 연락을 못했네… 저번 1월부터는 내 폰에 있는 정보가 다 지워져 버려서..
    내 홈피에 들려서 너 전화번호 남겨주렴.. 가끔 가다 생각나면 전화하고 그랬는데 못해서 아쉽데이..
    을유년 새해에는 복 많이 받고, 건강하게 잘 지내렴 ^^

  2. 노트북을 수리 맡긴 까닭으로 확인이 늦었어. 미안.
    너도 남은 시간동안 몸 건강하게. 스트레스 덜 받으며
    목표한 계획을 차분하게 밀고 나갈 수 있는 한해가 되기를 빌어줄께.

    그나저나 우리 못본지 너무 오래되었는걸
    마지막으로 술잔을 나눈지도 벌써 반년이 넘은 것 같아.
    주말에 전화할께. 집에 내려오면 만사 제쳐두고 일단 갈증 먼저 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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