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취인미상

잘 지내고 있나요?
서늘한 아침 바람을 맞으며 버스에 올랐다가 어느 사이에 화사한 단풍이 거리를 채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번잡한 정도는 아니지만 하루 하루 변해가는 나뭇잎을 지켜보는 것은 사치임이 분명한 일상을 보내는 중이었거든요. 당신도 무척 바쁘겠죠? 나만큼이나 바쁘게 보내고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아요. 그렇지 않다면 궁벽한 이곳에서 이야기 나눌 벗 하나 없이 방치된 내 삶을 외면하는 것이나 다름 없으니까요.

난생 처음으로 책장에 읽지 않은 책이 쌓이고 있는 중이예요. 책을 모으는 버릇은 그대로인데 그것을 읽을 시간만 없는 셈이죠. 처음으로 읽을 책이 많아서 엄두가 나지 않는다던 사람들의 넋두리가 이해되고 있어요. 일주일이면 모조리 읽어버릴 분량이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일주일마저 사치거든요. 사실 이제는 슬슬 체념에 가까운 상태가 되어가 가고 있어요. 나중에 즐길 디저트를 상상하는 기분으로 책장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렵니다.

사실 오늘 아침에 본 것은 지금 남겨놓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햇살에 찬란히 빛나던 단풍만이 아니었어요. 어린 시절 걸어 다녔던 작은 골목길과 지금의 나를 만든 이 곳에서의 시간이 층층이 생각났거든요. 이 막간극이 끝난 뒤에는 아마 난 다시는 이땅을 밟지 않을꺼예요. 산에서 따온 나무 열매들이 가득 담긴 보자기를 이고 버스에 타는 노파들의 뒷모습 역시 다시는 못 보게 될 것이 분명하구요. 한편으로는 아쉬우면서 냉정하게 이곳의 끝 모습을 바라보는 난 하인리히 만이 그려낸 앙리가 된 기분 이예요. ‘다시 못 볼 사람이기에 그는 기억해야만 한다’ 요즘처럼 이 말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렸던 적은 없었는데 말 이예요.

참. 잘 지내고 있다는 말을 빼먹었네요. 늘 한잔이 남는 커피메이커를 보거나 버스의 배너에 달린 모 언더웨어 회사의 광고를 보면서 잠시 결혼이란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하면서 10초쯤 망상에 빠지는 것을 제외하고는 마음이나 정신이나 온전히 ‘내 작은 전투’를 위한 준비에 몰두하고 있는 중이거든요. 난 쿠드라의 군기를 예쁜 가브리엘에게 받친 바보가 아니니까 걱정 같은 것은 할 필요 없다는 것 알고 있겠죠. 하지만 일주일에 5분쯤은 걱정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나 역시 그만큼은 당신을 떠올리며 흐뭇해 하니까요. 그마저도 반칙이라면 반칙. 거기에 더해 비겁하기까지 한 행동일까요?

사실 이 글을 쓰면서도 당신이 누군지 잘 모르겠어요. 누가 이 글을 읽고 스스로가 당신이라고 믿어줄까요? 기대감이 이내 배신감이 되고 의혹이 되었다가 희망으로 다시 절망으로 변할 이런 편지를 왜 쓰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자문하고 있는 중이예요. 하지만 이런 편지 한 장 남기지 않고 가을 보낸다면 내 삶은 너무 고루하고 재미없을 테니까요. 할로윈을 준비하며 쓰는 장난쯤으로 이해해 줄래요? 아! 오해는 하지 말아줘요. 악의적인 의도 같은 것은,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뽑아내려는 의도 따위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나조차 누군지 모르는 당신에게 스물 다섯 시월의 밤은 입맞춤이 생각나는 시절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우리가 입맞춤을 나누기나 했는지, 나누었다면 어떤 느낌이었는지는 이제는 하나도 기억 나지 않지만 아무렴 어떻겠어요. 당신에게는 미안하지만 입맞춤의 상상만으로도 나는 유쾌하고 기분 좋게 나른해지거든요. 벌써 줄일 시간이 되었군요. 가장 허망한 것이 언어와 시간이라던데 아쉽게도 난 한평생 두 가지에 기대어 살 운명을 지닌 것 같아요.

꿈꾸는 모든 것들이 마법처럼 이루어지는 그런 내일이 되기를 빌며! 혹 그렇지 못한다 하더라도 절망하지 않는 내일이 되기를 기원하며!

5 thoughts on “수취인미상”

  1. 어디 하나 손 댈 곳이 없는데…
    마치 A+ 받은 전략케이스 레포트를 본 것 마냥,
    전부 도용하고 싶은 마음 뿐이다.ㅋㅋ
    나중에 로열티를 받아 가시오!ㅎ

  2. /Dear S.
    I believe ‘time heals all thing’

    /
    로열티는 사대 뒷편 벤치에서 현물로 지급해 달라!
    아니면 ‘즐겁고 유쾌한 대화’에 나도 껴주던지.

  3. 지적인 충실함으로 단단하게 무장한 자만심이 당신의 글에서 엿보이는군요.
    궁벽하다는 말을 매우 자주 쓰시던데. 장차 어떤 세계를 사실 분이길래 궁벽하다는 표현을 그리도 남용하시는지…

    함부로 비하해서 생각해도 되는 민중은 이 땅에 없음을 잊지는 말았으면 좋겠군요.

  4. ‘궁벽하다’라는 말 속에 담긴 이중성을 모르는 당신이 어떻게 포풀라리스가 되었는지, 혹은 정말 포풀라리스가 맞기나 한 것인지 의심스럽지만 자만심에 대한 비난에는 저 역시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군요.

    하지만 ‘민중’이란 단어를 남용한 당신이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늘 그 보자기를 날라 버스에 싣고, 구수한 할머니들의 환담을 음악 삼아 자라난 나의 작은 추억을 훼손했다는 사실만은 알아주었으면 좋겠군요. ‘민중’이란 개념 이전에 애증이 교차하는 ‘이웃’이 무엇인지 잊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반만 아는 진실은 진실이라고는 하나도 담겨져 있는 거짓보다 더 무서운 법이랍니다. 단지 수사적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라고 가볍게 넘기지 말아 주세요. 행간을 읽는 것만으로 발화 속에 담겨진 의도를 온전하게 파악했다고 생각하시면 큰 낭패를 당하게 된답니다.

    제가 행인氏를 모르는 것처럼. 당신 역시 나를 모릅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이 세상은 lemon market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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