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설팅펌에 대한 단상

대학에 처음 입학할 당시에 가고 싶던 직장은 컨설턴트였던 것 같다. 학교신문사에서 수습 기자로 일하면서 대부분의 컨설팅 펌들의 설명회는 다 들어간 듯 싶었는데 그 당시 나의 솔직한 감상은 정말 멋있다는 생각뿐이었다. 검정 색 오피스 슈트도 멋있었고, 업무 분야의 다양함과 컨설턴트들이 지닌 당당함이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보였던 듯도 싶다. 단지 컨설턴트가 되는 것을 대학 시절의 목표로 삶는다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리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기자 신분증을 이용해 리셉션 테이블에서 이런 저런 질문을 던지면서 컨설턴트에 대한 환상이 조금씩 깨진 것 같다. 당시 설명회에 나온 컨설턴트들은 주로 BA였는데 대화를 통해서 파악한 그들의 일은 소위 [딱 갈이]로 불리는 제록스 머신의 휴머노이드 형태였다. 번역과 자료 준비. 복사(카피& 페이스트 포함)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으면 입사도 어렵다는 그런 직장에서 하는 일이 보통 직장의 1.5.배의 연봉을 받으면서 하는 일이 겨우 그런 일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 같다.

어느날 Bain&Co.의 AC와 대화를 나눌 기회를 잡았던 듯 싶다. 어느 정도 컨설팅 펌 특유의 분위기에 익숙해진 난 단도직입적으로 3년 후의 전망에 대해서 물어봤다. [베인에서 3년 뒤에 자신의 위치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십니까?] 한참을 머뭇거린 끝에(달변인 컨설턴트들이 할말을 찾아 머뭇거린 사실 자체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그가 한 대답은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었다.

회사에서 보내주는 MBA다녀와서 정식 컨설턴트가 된다면 좋겠지만 가능성이 없다면 일단 이직을 고려하겠죠. 따로 MBA를 다녀와서 AC가 아닌 정식 컨설턴트로 다시 지원하는 방법도 있구요. 제가 알기로는 AC 경력자를 우대하는 정책을 가지고 있거든요.

사실 결정적으로 컨설턴트라는 직업에 대한 흥미가 떨어진 것은 두 가지 사건을 통해서 였다. 취재차 어떤 모임에 참석했다가 대기업의 임원인 어느 선배 분이 하는 말을 듣게 되었는데 그 분의 말을 듣는 순간 비즈니스 세계의 냉혹함에 치를 떨었던 듯도 싶다.

컨설턴트? 나도 MBA를 다녀왔지만 MBA에서 배우는 태반은 어떻게 좋은 회사에 취직하는 가에 대한 요령이라고. 알량한 MBA하나 믿고 현장 비즈니스가 뭔지도 모르는 새파란 애송이들이 프로세스를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을 보면 웃음 밖에 안 나와. 전략 팀에서 몰라서 손을 안 댔겠어. 실행 여건이 안되니까 주저하고 있던 것이지.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은 어떻게 실행 여건을 만들어 내느냐는 문제 아니겠나? 요즘 생각하면 컨설팅펌에 오더를 주는 것 자체가 일종의 tax같아. Financing과정에서 어느 컨설팅 펌에서 다녀갔다고 하면 대체로 후한 평가를 주니까 말이야. 일종의 name value를 구입하는 것인 것 같기도 하고…

두 번째 충격은 M사 서울사무소에서 실시한 한국의 여성 인력에 대한 리서치 결과였던 것 같다. 파이낸셜 플래너 혹은 보험 설계사를 한국 내 여성 고급 인력들이 가장 많이 진출한 분야로 진단을 했는데 한국계 미국인인 그 컨설턴트의 발표를 듣는 순간. 비웃음을 참지 못했던 것 같다. [내가 여자 친구들에게 보험설계사가 되어 보는 것이 어떠냐고 묻는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아마 맞을지도 모르겠지. 어쩌면 그날부로 인간 관계가 종언을 고할지도 모른다고…]

저 사람은 여성 고급 인력의 범위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 것일까? 진지하게 묻고 싶어졌다. 영어 발음이 매끄러웠다면, 아니 주변에 퍼스트 랭귀지가 영어인 친구 하나만 있었더라도 틀림없이 질문 했을 것이다. 뒤에서 지속적으로 압력을 넣고 있는 교수님을 무시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사실 대놓고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블랙 슈트로 몸을 감싼 그 여성 컨설턴트들의 능력에 심각한 회의가 든 것 같기도 하다. [아마 최고 학부를 나왔을 텐데 말이야. 어째 저렇게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것일까? 아마 저 보고서를 손에 든 여성부 이사관은 M사도 별 것 없다고 중얼거리겠지. 잘못된 자료 해석으로 내린 엉망 진창인 결론이니까 말이야]

[#M_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습니다. Click!!| 어디까지나 사견입니다. |
지금까지의 글을 흐름으로 볼 때. 내가 컨설턴트들에 대해 부정적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부정적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컨설턴트들은 일명 외국계 전략 컨설팅 펌과 그곳에서 일하는 BA에 대한 회의다. IT영역이나, CRM, ERP와 식스 시그마와 실무 영역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하부 프로세스에 대한 컨설팅을 전문으로 하는 진짜 컨설팅 펌들을 비난할 의도는 전혀 없다.

학교를 다니면서,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고, 존경 받는 경영자들에 대해 분석하면서 내가 느낀 것은 전략 프로세스와 운영 프로세스, 그리고 인력 프로세스만큼은 절대 아웃소싱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이들 프로세스도 어느 정도 컨설팅이 가능하겠지만 기업의 핵심 프로세스인 이 세 가지 영역은 기업의 경영진이 심사 숙고하고 고민할 문제다. 어느 정도 도움을 받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원칙적으로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 제3자가 어떻게 해줄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 나의 소소한 결론이었다.

메임 프레임의 전략 계획을 짜내는 수준은 일류급이지만 그것을 실행에 옮길 하부 프레임과 상세한 매뉴얼 작성에는 어설픈 것이 지금까지 내가 보아 온 전략 컨설팅펌이었다. 그 기업 특유의 인력 프로세스와 운영 프로세스에 정통하지 못한 사람들이 내놓은 전략의 한계를 뼈저리게 보여주었던 것이 바로 그들이다. 생각하는 법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각을 리포트로 만들어 던져 주었던 것이 과거 그들이 모여주었던 [일의 방식]이었다.

이런 생각의 토대가 된 것은 고객의 order에 수익이 달린 service firm인 주제에 무척이나 오만했던 과거와 진짜 실적보다 컨설턴트들의 화려한 경력으로 포장된 Halo Effect를 주영업력으로 삼은 것에 대한 불신일지도 모르겠다.(물론 한국만의 특수 상황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글을 쓰고 있지만 현재의 내 경력이 내가 그렇게 비아냥거리는 전략 컨설팅 펌에 들어가기에는 한참이나 미달이란 사실은 솔직하게 인정한다. 주변 선배 중에 컨설턴트가 없는 것도 아니고, 어쩌면 친구들 가운데 상당수는 컨설턴트를 직업으로 선택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의 불신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최소한 한국에서 활동한 컨설팅 펌들이 지금껏 본분을 망각했다는 내 생각에 딴지를 걸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말은 이렇게 하고 있지만 나 역시 제대로 된 컨설팅 펌을 세우고 싶다던 어떤 이의 원대한 꿈에 동조하고 있는 것인지도…_M#]

경제 위기론에 관하여

박승 한국은행 총재의 인터뷰를 읽었다. 중앙은행의 수장으로써 기자들의 질문에 자신감을 내보인 것까지는 좋았지만 문제의 본질을 호도했다는 생각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고유가로 인한 인플레이션에 대한 방어책으로 금리를 인상시키거나 통화공급을 수축시키는 정책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답변은 지극히 원론적인 수준의 답변이지만 이론의 여지가 없는 명답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재의 경제 위기론이 과대 평가 됐다는 답변은 중앙 은행의 수장으로서 보이는 ‘깡’ 이상으로 보기 어렵다.

사실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지금이 몇 번째 경기 국면인지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가장 긴 경기 국면 주기일지도 모르고, 일부 연구처럼 사이클의 매우 짧아진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이 활황의 예비 단계라는 루머를 액면가 그대로 믿어주기에는 이 동네에서 먹은 밥이 너무 많다. 진짜 저점을 통과했는지도 확언할 수 없는 시점에서 경기 순환론을 근거로 경기가 회복하고 있다는 주장은 어딘지 아귀가 맞지 않는다.(경기 선행지수도 활황을 알려주기에 부족하고, 재고지수도 마찬가지다)

경제 위기론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의 차이는 주어진 자료를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는가의 문제다. 경제의 장기적인 발전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지표상 경제 위기로 보기 어려운 점이 분명 존재한다. 경제 성장률은 지난 분기 5.3%을 기록했고 환율은 안정되었으며, 금리도 매우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실업률도 지표상으로는 분명하게 조금이나마 줄어 들었다. 기업의 매출순이익률은 늘어 났고, 부채비율도 역대 최저 수준이다. 차이나 쇼크와 유가 상승이라는 악재가 겹쳤지만 그래도 수출에 매우 큰 타격을 입힌 것 같지는 않다(참아낼 만한 수준의 타격이라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 같다)

하지만 이런 긍정적인 지표 속에는 숨겨진 이면이 있다. 지난 분기 경제 성장률은 5.3%이지만 동일 기간 내 수출 성장률은 15%대 였다. 수입 성장률을 고려해도 NX(Net Export)의 대부분이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문제는 이런 성장이 일반 국민 계정의 소비 증가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데 있다. 신규 투자 선행지수는 여전히 100이하이며 기업들은 저렴한 금리와 높은 수출 성장률 덕분에 거두어 들인 순익을 부채를 줄이는 데 쓰고 있다. 이 두 가지 상황을 해석해 보면 상황은 위기에 가까운 쪽으로 저울추가 기운다.

콜금리와 시장 금리가 매우 근접한 현상황에서(심지어 콜금리의 추가적인 인하까지 논의 되고 있는 상황에서) 기업이 신규 투자 대신에 부채를 줄이는 데 혈안이 되어있다는 뜻은 신규 투자할 프로젝트가 없다는 설명이나 장기적으로 금리가 요동칠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시그널이다. 하지만 금리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는 아직 불명확하다. 다만 현재로서는 신용 경색의 가능성은 매우 낮기 때문에 금리가 상승하기 보다는 하락할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다만 연방단기금리의 인상폭이 매우 커진다면 이 것은 우리 금융 시장에도 분명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렇다면 부채를 줄이고 현금 보유액을 늘리는 기업 파이낸싱 전략의 어떤 의미를 포함하고 있을까? 첫번째로 떠오르는 것은 필립 부틀러의 주장대로 장기적인 디플레이션의 가능성이다. 장기적인 디플레이선 가능성이 존재하는 경우 현재의 기업 파이낸싱 전략은 가장 효율적이다. 낮은 금리 수준과 가용 자본량이 낮은 상황에서 통화의 가치가 상승하는 디플레이션이 발생할 경우 현금을 보유함으로써 (다시 말해 현금에 투자한다는 의미다)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부틀러의 주장에 관해서는 그의 저서 [부의 대전환]을 참고하세요)

물론 저금리 상황에서 디플레이선 발생하더라도 즉각적인 자본 공급에 어려움은 없으며 기업이 현금에 투자하는 유인을 과대 평가 했다는 비난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비난의 토대는 솔로우 모형이나, 개방 경제 모델 안에서만 가능한 이야기이며, 거래 비용이 0이며 금리차와 리스크가 없는 경제 모델은 실질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또 중앙은행이 디플레이션에 대하여 완벽한 대응 수단을 가지고 있다고 비난이 불거질 수도 있겠지만 일본의 장기 침체를 보라. 일본 중앙은행의 엘리트들이 돈을 찍어 낼 줄 몰라서 안 찍었겠는가?

두 번째 가능성은 금리와 경제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최선의 의사 결정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현재의 상황으로 볼 때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공산품의 가격은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으며, 부동산은 약세로 돌아선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부채의 가치가 폭락할 확률은 매우 낮으며, 가격이 지속적으로 떨어지는 고정 자산에 투자하기 보다는 현금 같은 유동 자산에 투자하는 편이 운용의 묘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런 가능성은 어디까지나 최대한 온건한 입장에서 기술한 것이다. 조금 쉬운 표현을 쓰자면 기업 입장에서는 정부나 정치권에 아쉬운 소리해가며 사업하기 싫은 것이고(다시 말해 은행 대출과 로비에 학을 떼었다는 표현도 가능하겠지), 이 나라에서 사업을 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주시하고 있으며(그러니까 신규 투자를 안 하지), 여차해서 가망이 없다고 판단되면 확 해외로 튈 준비를 하고 있다는 해석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그래서 고정 자산에 투자를 안 하는 거다. 유동 자산으로 들고 있어야 튀기가 쉽지.)

사실 경제 위기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신뢰 관계의 붕괴와 펀덤멘탈의 문제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지난 몇 년 동안 우리 경제는 앞날을 생각하는 장기적인 비전에 투자하기 보다는 눈 앞에 닥친 위기를 벗어나기 급급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가계와 기업 정부간의 신뢰 관계는 최악의 국면에 접어 든 것으로 보인다. 정부에서는 [자기 실현적 예언]을 경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계 부분에서 보기에 현재의 경제 상황은 [예언]을 걱정할 판이 아니라 시급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실제 상황]이다.

정부에 대한 기업의 신뢰감 역시 가계와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인다. 아무리 정부가 투자를 독려하고 경제 단체장과 간담회를 가져도 기업 입장에서는 공수표 한 장을 떼어줄 따름이다. 기업 입장에서 보기에도 심심하면 오라 가라 부르며, 중요 정략에 대해서는 방관을 최적의 정책을 삼는 정부가 더 이상 사고 좀 안쳐줬으면 하는 바람인 모양이다.

신뢰를 주지 못하는 정부는 결국 경제의 선순환 시스템을 붕괴 시킨다. 처음에는 소소한 불신이지만 소소한 불신이 만들어낸 부정적 영향력은 순환 과정을 통해 몇 배로 중첩된다. 그리고 종국에는 경제 성장률이 올라가도 실물 경제는 바닥을 벗어나지 못하며, 높은 매출이익률을 내는 기업들은 투자 보다는 관망에 주력한다. 정부는 무능함으로 성토를 당하며 다시 신뢰를 상실한다. 대통령이 아무리 [자기 실현적 예언]을 경계해도 이미 서푼짜리 보다 못한 정부의 말에 기업과 가계가 납득될 리 만무하다.

수출과 금리, 환률의 삼박자가 맞아도 경제 주체간의 신뢰가 붕괴되고 성장 엔진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진행되지 않으면 종국에는 단지 엇박자가 될 공산이 크다. 해외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해외로 빠져나가는 국내 기업을 붙잡으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정경 분리의 원칙을 세우면서도 경제에 대한 정치의 지배 논리는 여전하다. 분리는 하되 누가 힘이 센지는 분명하게 집고 넘어가겠다는 그 태도를 버리지 못한다. 가계는 어떤가? 지난 6년 동안 경제의 분배 시스템은 더욱 왜곡되었고, 기존의 사회관이 붕괴 일로를 걷고 있으며, 사람들 대다수가 피부로 느끼는 경기가 최악인데도 불구하고 정부가 옳다면 옳은 것이라는 권위주의적 정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위기를 벗어나는 길은 어렵지 않다. 다만 몇몇 핵심 전문가들의 머리에서 짜낸 정책 수단으로 뒤집기에는 너무 멀리 왔을 따름이다. 이런 상황에서 행정부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느리더라도 꾸준하게 신뢰 관계를 회복하고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역량을 집중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강력한 매력과 현혹으로 긍정적 자기 실현적 예언을 온 국민에게 주입시키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번 행정부는 첫번째 방법을 사용할 정도로 책임감 있지도, 두 번째 방법을 사용할 정도로 멋지지도 않다. 결국 우리에게 남은 길은 상황이 더 나빠지지 않기를 빌며 몇 년을 더 기다리는 것 뿐이다.

느낌 혹은 단상

이필상 교수가 지난해부터 줄기차게 주장한 것처럼 한국 경제는 외과 환자가 아니라 내과 환자임에 틀림없다. 그것도 중환자실에 입원한 의식불명의 환자로. 외과 환자는 응급 치료술인 수술로 개선이 가능하지만 내장 기간에 문제가 생긴 내과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꾸준하게 지속적인 치료다. 내과 환자에게 충분한 영양(예를 들어 NX)이 공급 되어도 장기에 손상을 입은 환자가 이를 건강을 개선하는데 사용하기란 요원해 보인다

사실 정부나 한은 측의 주장과 다르게 학계에서 내놓은 의견은 성장 동력이 꺼져 가고 있으며, 현재의 성장 동력을 대체할 산업의 육성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그리고 5월 이후 경제 위기론이 고개를 들기 이전에 경제 관료중의 한 사람이 한국 경제를 망망대해에서 엔진이 고장 난 배에 비유 했는데 이 발언이야 말로 현 행정부의 핵심 테크노크라트가 보는 우리의 실상이 아닐까 싶다.(그런데 이필상 교수님. 학점을 너무 짜게 준다. 때때로 옆길로 새는 수업은 재밌지만 재무관리와 금융론은 나 같은 머리 나쁜 범인이 듣기에 너무 나쁜 수업이다. 너무 팍팍 뛰어 넘는다는 것이 문제… 게다가 시험 문제에서 나오는 공식 유도를 세상에서 가장 외우기 싫어하는 나로서는 대략 낭패다)

닷컴

인터넷 붐이 꺼진 이후 소위 인터넷 기업들로 불리던 닷컴 기업들의 전략에도 변화가 생긴 것 같다. 합리적인 아이디어와 기술력으로 승부하던 초기의 벤처들과 다르게 오늘날의 닷컴기업들의 기본 전략은 마케팅이다. 이것은 기술력의 차별화가 두드러지지 않을 정도로 각 기업들의 평균 수준이 비슷해진 요인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평균 기술 수준을 구축하는데 소요되는 한계 비용이 줄어든 현실도 큰 몫을 차지하는 것 같다.

디지털 경제에서는 초기 서비스 구축에 대부분의 비용이 소요된다. 서비스 이용자 1인을 추가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한계비용의 코스트는 제로에 가깝다. 게다가 기술 수준의 발전으로 초기 서비스 구축에 필요한 비용은 하드웨어적인 투자보다 소프트웨어적인 투자와 인건비가 대부분이다. 소프트웨어와 인건비를 코스트로 생각하기보다는 훗날 보상을 얻기 위한 일종의 간접 투자로 인식하는 닷컴 기업의 특징으로 생각해볼 때 디지털 경제에서의 초기 투하 자본의 크기는 매우 작다.

하지만 투하 자본에 비하여 닷컴 기업들의 운용할 수 있는 유동성은 매우 큰 편이다. 배당 가치나 수익에 의한 냉정한 평가보다는 미래의 경제적 가치인 EVA에 의해 평가받는 닷컴 기업의 특성상 등록 기업들의 경우 실제 기업의 실제 크기보다 많은 유동성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 통례이다. 바로 여기에서 오늘 우리가 논의하고자 하는 문제가 시작된다.

실제 기업의 크기보다 많은 유동성과 낮은 구축 비용, 합리적인 경영자라면 남은 가용 자원을 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사용해야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 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 투자할 것이냐고 묻는다면 대답의 갈래는 여러가지이다. 하지만 수익과 성과에 목말러하는 직원들과 투자가들의 ‘눈치’에서 자유롭지 못한 대부분의 경영자들이 생각하는 갈래는 바로 마케팅 강화다. 이것은 투자의 성과가 느리게 나타나는 연구 개발과 인력 개발보다는 과감한 마케팅 투자의 성과가 보다 가시적이기 때문이다.

사실 경영자들의 이런 선택에도 나름대로의 논리적인 근거가 있다. 사소한 경품을 내건 이벤트 프로모션 하나로도 접속자수의 증가는 폭발적이다. 인간에게 호기심이란 결코 떨쳐버리지 못할 감정이 있는 한 이벤트 프로모션은 절반 이상의 성공을 보장한다. 미래를 알 수 없는 불확실한 투자보다는 절반 이상의 성공을 보장하는 마케팅에 가용 자원을 쏟아붓는 것이 이들 경영자들에게는 우세 전략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대다수 닷컴 기업들이 우세 전략을 선택한다는 근거아래 마케팅 투자를 늘리면서 시장은 혼탁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경쟁이 과열되면서 마케팅 차원의 지출이라 부르기에는 부적당한 유형의 지출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심지어 유명한 커뮤니티나 블로거, 영향력 있는 유저들을 사들인다는 소문은 더 이상 조심스레 떠도는 입소문조차 되지 못한다. 기업들은 새롭게 시작된 서비스의 성공을 위해서 사람들을 사들이고 경쟁 기업에서는 기술보다 더 중요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이런 지출을 아끼지 않는다.

사실 이 글에서 기업들의 윤리성을 따지자는 것은 아니다. 수익성도 좋고, 윤리적인 기업이라면 더할나위 없겠지만 윤리적인 기업과 수익성 좋은 기업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면 주저없이 수익성 높은 기업을 선택하는 것이 인간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 필자다. 하지만 닷컴 기업들의 이런 혼탁한 자태는 꼴불견으로 다가온다.

90년대 초반 닷컴 기업들은 열정과 창조적 아이디어로 하나로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 하지만 오늘의 닷컴 기업들은 오랜 역사만큼이나 능구렁이 같은 심사를 지닌 거대기업들과 전혀 차이가 없다. 심지어 오늘날 닷컴 기업들이 보여주는 한심스런 작태는 이들 거대기업들 보다 더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근래들어 조금 나아지는 닷컴 기업들의 수익성에 이번 한번만큼은 눈감아 주리라 마음 먹었다.

하지만 닷컴 기업의 빠질대로 빠진 윤리성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닷컴 기업들의 서비스 그룹화’다. 사실 다각화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지만 닷컴 기업들의 다각화는 비합리적이다. 남다른 서비스 차별화를 이루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남들하는 것은 다 똑같이 하자라는 지극히 경멸 받아 마땅한 생각에서 나온 다각화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맹목적인 다각화를 뒷받침하는 요소가 낮은 개발비용과 풍부한 마케팅 지출이다.

그런데 이런 맹목적인 서비스 다각화가 과연 닷컴 기업의 수익성에 도움이 될지는 의문이다. 인터넷과 기술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사람들은 전문화되고 차별화된 서비스에 시선을 끌린다. 사람들의 주머니를 열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어 당길 수 있는 것은 단기적인 프로모션만이 아니다. 차별화되고 꼭 필요하며 유용하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사람들은 주머니를 열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오늘날 닷컴 기업들이 하고 있는 아무런 차별성 없는 다각화에 주머니를 열 순진한 사람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 닷컴 기업들이 밟아가는 길은 과거의 신생 기업이었던 오늘의 거대 기업들이 걸었던 길과 점점 유사해지고 있다. 단지 그 범위와 기술이 다르다는 것일 뿐 그 행보를 설명할 수 있는 본질적인 영역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어쩌면 역사의 거대한 흐름이 반복되듯이 기업들의 행보 역시 설명하기 어려운 난해한 흐름 아래 종속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