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프랑스 총리였던 클레망소는 노쇠한 몸에도 불구하고 총탄이 날아다니는 최전방 전선을 시찰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혹자는 이를 보고 현장 감각을 중요시하는 정치인이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전방을 시찰하는 클레망소의 표정이 어린아이처럼 즐거웠다는 사실과 군사협력 문제로 프랑스를 찾은 젊은 처칠에게 그가 속삭였다는 「이 얼마나 짜릿한가!(Quel comment deliceux!」를 위의 일화에 끼워 넣고 보면 의외의 모습이 드러난다. 정치인으로써 많은 격랑 겪은 그조차도 남몰래 전쟁이 주는 짜릿함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짜릿함이란 감정은 무엇일까? 증시가 예상외로 많이 오른 날 증권 객장을 찾아본 사람이라면 짜릿함의 정체에 관하여 어느 정도 감을 잡을 것이다. 자신이 투자한 종목이 상한가를 쳤을 때 혈관 속을 타고 도는 기묘한 흥분을 느껴본 적이 있어본 사람이라면 아예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 의외의 결과를 얻어낼 때 느끼는 감정, 이것이 바로 짜릿함의 정체다. 그렇다면 투기와 짜릿함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
사람들 대부분은 왜 투기를 하느냐는 질문에 이른바 대박이 가져다 줄 경제적 여유를 답으로 내곤 한다. 물론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 말이다. 하지만 도박사들처럼 대다수 투기꾼들은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 아주 소수만이 투기로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런 행운이 자신에게 찾아올 가능성보다는 지나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투기꾼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투기를 한다. 대박을 쫓는다는 애매한 대답으로 짜릿함을 쫓는 자신의 감정을 속인 채 말이다.
튤립 버블과 사우스 시 버블, 미시시피 버블은 투기의 교과서라 불릴 정도로 많은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버블은 끊임없이 부풀었다가 꺼지기를 반복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몇 백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 그렇다면 버블과 투기 짜릿함은 어떤 함수로 묶여 있을까?
먼저 네덜란드 튤립투기를 살펴보자. 대항해 시대 포르투갈이 누리던 독점적 향료무역권을 빼앗은 네덜란드인들은 최고의 경제적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먼바다에서 돌아오는 배들에는 짜릿한 전투와 모험의 흥분 대신 상인들의 냉정한 손익계산이 실려 있었다. 항구에 입항하는 선원들의 이야기에 흥분하던 군중은 새로운 무언가를 원했다. 경제적 안정과 짜릿함에 대한 갈망이 절묘하게 맞물려 돌아가면서 튤립에 대한 투기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18세기 초 영국에서 등장한 사우스시 버블 또한 짜릿함과 무관하지 않다. 네덜란드와의 해상패권 다툼에서 승리한 영국은 대서양을 자기들의 바다로 만들었고 의회정치의 발달로 국민 개개인의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있었던 시기였다. 기존의 계급사회가 빠르게 무너지고 그 빈틈을 메운 시민계층들은 새로운 흥분을 원했다. 그리고 사람들의 흥분에 기폭제 역할을 했던 것이 사우스시 사가 발행한 주식이었다. 당시 한 수필가가 남긴 「우리는 미친 시대에 살았다. 나 역시 이것이 얼마나 허황된 꿈이었던가를 알고 있지만 짜릿함의 유혹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라는 회고는 이 시대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이다.
투기 붐이 조성되었던 당시의 유럽사회와 우리 사이에는 몇 백년이라는 시간차가 존재한다. 하지만 투기 한가지를 놓고 보면 이런 시간차가 무색해진다. 여전히 사람들은 짜릿함을 갈망하고 있다. 개발 시대에는 부동산 투기를 했고 성장시대에는 온 국민이 주식에 투자를 했으며 오늘에 이르러서는 로또를 산다. 대다수 사람들은 투기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짜릿함이 주는 행복감을 위해서라면 이런 위험성을 손쉽게 받아들인다. 어쩌면 짜릿함에 대한 기회비용이라고 자신을 납득시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투기에 대한 우려를 내보이고 있다. 하지만 말쑥한 옷차림과 온갖 편리한 도구들로 넉넉한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현대인들에게조차 분명 부족한 것은 있다. 어쩌면 현대인들은 몇 천년 전 조상들이 자연이라는 거친 위험과 싸우면서 터득했던 이 기묘한 흥분감에 목말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 역시 투기를 꿈꾸기는 하지만
사실 이 글은 작년 2월에 쓴 글이다. 당초 게재되었던 곳은 예전에 일하던 학교 신문사의 특정 지면. 기사에 대한 책임과 권리는 신문사와 발행인에게 귀속된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지만 어쩐지 오늘만큼은 불문율을 어기고 싶다.
처음 이 글을 쓴 때로 부터 1년 반이 지났다. 이 글을 쓸 무렵에는 부동산이 최고의 투자처로 떠오르고 있었는데 지금은 느리지만 지속적으로 부동산 가격이 빠지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무언가에 투자를 하고 싶어 한다. 심지어 요즘처럼 유가가 요동치는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어딘가에 투자를 하고 싶어한다. 변동성이 큰 만큼 투자 자체가 매우 모호하고 위험한 현 순간에도 말이다.
훗날 배후지의 목재가 사라지고 달마티아 지역이 카톨릭으로 편입된 이후에는 흑해로 목재와 노예의 공급원을 옮겼다. 이때 베니스가 흑해의 상인들에게 대가로 지불한 것은 베니스 본국에서 생산되던 소금과 레이스, 유리제품을 유럽에 판매한 대가로 얻은 곡물이었다. 이 단순한 삼각 무역은 맘루크 왕조가 오스만 투르크에게 무너질 때까지 이백년 동안 상업 국가 베니스의 기초가 되었다.
그렇다면 실제 역사에 기록된 또 다른 삼각 무역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 19세기 이전까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삼각 무역은 중국과 아메리카, 유럽을 잇는 차와 은의 삼각 무역이다.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채광된 은은 태평양을 건너 중국산 차의 대금으로 치루어 졌고, 이렇게 사들인 차는 유럽으로 옮겨져 소비되었다. 아메리카 식민지의 은이 말라갈수록, 다시 말해 인디언들을 쥐어 짜던 유럽인들의 손이 메말라 갈수록 유럽에서의 은유출 속도는 빨라졌고, 당시 해상 무역을 장악하고 있던 영국은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19세기에 접어 들면서 동인도회사가 내린 특단의 조치가 바로 인도의 아편 수출이다. 아편의 수출량이 늘어날수록 인도의 대중국 무역흑자의 규모는 늘어났으며, 영국은 인도 시장을 지배함으로써 중국에서 거두어들인 거대한 부를 유럽으로 이전해 나갔다. 보다 많은 중국인들이 아편에 중독될수록 차와 은은 유럽으로 빠져나갔고, 이는 보호주의 무역 장벽에 부딪쳐 아메리카와 유럽에서 [물을 먹고 있던 영국]을 구해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