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효과

Intro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영화를 볼 때면 대한극장으로 향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학교에서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총애를 받던 MMC는 교통혼잡으로 선택항에서 소거되었고 한 두 정거장 차이지만 서울극장의 커플석은 꽤나 부담스럽다.(무엇보다 허리를 쭉 펴면 뒷자리의 원성을 엄청 들어야 했다) 결정적으로 태양이 중앙광장에 따갑게 쏟아 내리던 과거의 어느 오후 분수대 벤치에서 잡히던 미약한 무선랜의 시그널로 로드할 수 있던 홈페이지는 대한극장 밖에 없었던 것 같다.

습관적으로 지난 월요일에도 대한극장을 향했다. 어린 시절에는 영화에 집중하느라 물도 마시지 않았던 나였는데 어느 사이에 극장 오른편에 있는 구멍가게에 들어가 쥐포를 산다. 사실 이런 버릇의 연원은 지선군에게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양이 대를 이어 예외를 습관으로 만들고 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극장에서 무언가를 씹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옆 자리에 앉아 혼잣말을 궁시렁 대는 WC군이나, 마음에 안 드는 장면이 나올 때 쥐포를 질겅질겅 씹는 나나 효용은 무차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Butterfly Effect
Butterfly Effect라는 단어가 우리의 상식에 진입한 것은 90년대 중엽으로 기억된다. 나의 십대 중반에 해당되는 그 무렵에는 이미 엔트로피와 카오스는 과학에 관심이 있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는 개념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복잡계 이론은 과학을 넘어 다른 학문에까지 침투했다. 그리고 십년이 흐른 지금에는 영화의 제목으로 쓰이며 감독의 의도를 풀어내는 키워드로 사용되고 있다.

사실 <나비효과>의 제목이 다른 것이었더라면 영화는 상황을 설명해줄 몇 가지 부연 설정과 에피소드를 삽입해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비효과>란 제목과 하나의 인용문으로 감독은 관객의 지적 허영심을 만족시키며 러닝타임 단축이라는 두 가지 효과를 동시에 얻어 내고 있다. 게다가 왠지 쿨한 감각상의 느낌을 갖게 만든다. 약은 수인 것은 분명하지만 약은 수 치고는 효과가 꽤나 괜찮은 것도 사실이다.

Retroactive
하지만 <나비효과>를 보면서 든 생각은 <레트로액티브>의 리뉴얼 버전이라는 생각뿐이다. 두 영화에는 7년이란 시간차가 있는 만큼 플롯과 설정은 조금 다르지만 본질은 똑같다. <나비효과>는 쉽게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되돌아가 새로운 삶을 엿보는 버릇의 영감이 되어버린 <레트로액티브>의 이란성 쌍둥이 동생쯤 되는 셈이다. 하지만 키 크고, 잘생기고, 어리숙하기까지한 애스톤 커쳐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레트로액티브>쪽이 더 재밌다.

<레트로액티브>의 핵심은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함부로 타인의 삶에 간섭하지 말라는 냉엄한 교훈이다. 때로는 상황이 삶을 변화시킬 수도 있지만 운명은 상황을 뛰어넘는 거대한 것이라 상황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결론은 늘 (혹은 거의) 똑같다. <<어차피 죽을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죽게 되어있고, 살 사람은 살게 되어있으니까 가던 길 가시오>> 수많은 반복 끝에 주인공 남녀가 깨닫는 교훈은 딱 이것 하나뿐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두 가지 측면에서 독특하다. 하나는 사막이라는 배경 설정을 통해 등장 인물의 행동과 영향력을 제한할 수 있는 연극적 효과를 도입했다는 사실이고, 늘씬한 금발의 심리학 전문가와 다분히 변태적인 사내의 미묘한 상황 전개를 통해 너절한 섹스 코드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이다.(<납치일기>에서 강간의 가능성이 르포르타쥐를 이끌어 가는 한 축인 것처럼 레트로액티브에서도 흠잡을 때 없는 미인과 능구렁이 같은 변태 사내의 성교 가능성을 암시하는 대화가 지루함을 방지하는 한 축이다)

상황을 넘어 삶에 도전하다
<나비효과>는 상황이 아닌 삶에 도전한다. 무대도 사막이라는 제한된 공간이 아니라 활짝 열린 계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작은 상황 변화만으로도 인생은 드라마틱하게 바뀐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상황이 아닌 삶을 통째로 바꾼 만큼 스케일의 변화는 크지만 치밀함은 부족하다. 그리고 치밀함이 부족한 만큼 중간중간 인과율과 동기가 모호해지기 쉽다.(사실 나비효과는 극단적인 인과율과 동기를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호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나비효과>는 이번만큼은 진지해진 애스톤 커쳐와 예쁘지는 않지만 시선을 떼긴 어려운 에이미 스마트를 내세워 이런 빈틈을 메운다. 재미있기는 하지만 어딘가 허전함이 느껴진다는 평은 사실 이런 시나리오상의 허점에 기인하는 것이다.

나비가 날아 올라 폭풍이 일어날 수는 있겠지만, 나비가 난다고 태도가 그리고 태도에서 비롯된 동기가 변한다는 절대적 확신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짧은 순간의 선택을 통해 삶과 태도가 변한다는 사실을 <보편적 진리>로 받아들이기에는 우리가 삶과 태도에 느끼는 지속성은 상당히 강하다.

박력 있는 시퀸스 전환에 깜짝 놀라던 하나양은 이내 점퍼로 눈을 가릴 준비를 한다. 궁시렁의 명수 WC군은 오늘따라 조용하고 까마듯한 제대를 기다리고 있는 정섭군은 눈은 어둠 속에서도 빛난다. 난 오늘따라 좁게만 느껴지는 좌석을 탓하며 몸을 왼쪽으로 기대에 보았다. 실상은 좌석이 좁은 것이 아니라 나에게 저런 능력이 있다면 언제로 돌아갈까 하는 문제로 마음이 답답한 것이었다. 21살 봄과 23살 여름이 마음 속에서 치열하게 다투고 있었다. 예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이 21살 봄을 선택했겠지만 지금의 난 23살 여름에 더 끌린다. 전부 花 탓이다.

If Only

When I was 17
생각해 보면 17살 당시의 난 지겹도록 공부와 멀었다. 기분 따라 오르락 내리락 하는 성적에는 무척이나 무덤덤했던 것 같다. 진짜 수능만 잘 보면 된다는 한탕주의가 심연에 자리잡고 있었고 스스로를 과신했던 것 같다. 아무튼 당시의 내 삶을 지배하고 있던 것은 공부가 아닌 책과 음악 그리고 영화였다.

지금도 그다지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당시의 난 균형 감각이야 말로 삶의 통찰력이라는 말을 흘려 듣고 있었다. 하루에 책 한 권을 읽고 원고지 20장을 쓰며, 일주일에 영화 두 편을 본다는 평범한 원칙을 몸으로 실천했다. 그리고 그런 십대 후반 가장 기억 나는 영화는 <난 지난 여름에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란 공포 영화였다. 사실 별 볼일 없는 이 영화가 기억에 남은 이유는 엔딩 크레딧을 기다리다가 심장이 멎은 것처럼 놀란 친구 녀석 때문이다.

아니 또 있다. 예쁘지는 않지만 호소력 있는 제니퍼 러브 휴잇에게 반했다고 해야 할까? 온갖 비난에도 불구하고, 특히 가슴에 대한 노골적인 촌평에도 불구하고 난 그녀가 좋았다. 나뿐만 아니라 내 주변의 친구들 대부분 암묵적으로 그녀를 좋아했다. 필름이나 프리미어 같은 영화 잡지에 농담조로 실리는 가슴이 큰 배우를 캐스팅 할 때 1순위는 휴잇이라는 말장난이 세상에서 제일 싫었다.

애니메이션 OST에서 클래식까지 헤비 메탈에서 얼터너티브 락까지 온갖 장르가 모여있던 교실 사물함에 제니퍼 러브 휴잇의 앨범은 항상 두 장쯤 있었던 같다. 그녀의 앨범을 발견하고는 ‘이런 것도 사냐’는 깔 봄에 ‘내 멋이다’라고 응수하는 장면은 꽤나 자주 목격할 수 있었던 풍경이다. 그런데 깔보는 쪽이나 응수하는 쪽이나 제니퍼의 뮤직 비디오가 흘러 나오는 순간에는 아무 말이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뮤직 비디오를 본 이후에는 상황이 반전되어 응수하는 쪽에게 그녀의 앨범을 빌리기 위해 자존심을 구겨야 했던 그 표정이 선하다.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그 시절 기분이 그랬다.

When I am 24
나이를 먹어가면서 어린 시절 좋아했던 배우들이 늙어감을 알게 된다. 주름하나 없던 젊은 얼굴에 나이가 내려 앉고 비키니가 잘 어울리던 그 뒷모습에서 허탈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도 젊고 예쁜 배우를 탐색하기 보다는 같이 늙어가는 그녀들을 만나러 극장에 간다. 놀랍도록 세세한 기억은 몇 년 전 어느 영화에서는 어땠는데 지금은 이렇게 변했구나 하는 짧은 감상을 내뱉는다.

사실 요즘은 이런 짧은 감상을 즐기기 위해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작품성이나 시나리오의 탁월함에 동의하기 위해서 라기보다는 내 추억과 내 멋을 위해서 영화를 본다. 시네마 천국의 마지막 시퀸스에서 토토가 알프레도가 편집한 필름을 보며 감동 받는 것처럼 지금의 영화 보기가 그렇다. 요즘처럼 번잡하고 바쁜 세상에서 우울하고 짜증나는 이야기로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영화를 보는 것은 고역이 된지 오래다.

If Only
2주 전 주말, 영화를 보기 위해 뭉친 동네 청년들 앞에는 두 가지 선택항이 놓여 있었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와 if only가 그것이었는데 에스컬레이터에서 한 청년은 이렇게 말했다. ‘손예진 볼 생각이 있냐? 난 솔직히 싫은데.’ 이어지는 대답들은 ‘나 역시 싫다’는 대답이었다. 내가 싫었던 이유는 손예진이 싫어서 라기 보다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니 비슷한 얼굴을 가지고 있음에도 전혀 다른 맵시와 자태는 사람의 성격을 자극하는 묘한 구석이 있었다. 마치 그녀의 존재 자체가 내 첫사랑에 대한 모욕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래서 싫었다. 그리고 동네 청년들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If only를 티켓팅했다.

사실 If Only를 보면서 느낀 생각은 영화에 대한 덧붙임이 아니었다. 남자 주인공의 죽음은 일찍부터 예상할 수 있었던 만큼 영화를 보는 내내 내 의식을 반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내 과거에 대한 성찰과 반성이었다. 생각해 보면 난 여태 마음을 다해, 목숨을 다해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상대를 믿지 못했고 거절의 공포와 미지의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서 거짓 용기를 꾸며 내었다.

아니 내 마음도 몰랐던 것 같다. 내가 스스로에게 확신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난 언제나 도망갈 퇴로를 찾고 있었다는 사실 하나뿐이다. 어느 건물에 들어가던 제일 먼저 안전하고 빠른 출입구를 확인하는 버릇처럼, 어느 술집에서나 화장실과 비상 계단을 확인하는 것처럼 난 사랑에서도 그랬다.

그러면서도 난 사랑에 빠져 있는 그 시간 동안 ‘오늘이 내 평생에 기록될 그 하루구나’ 하고 끊임 없이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단 한번도 그 하루에 진심으로 만족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나란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것이어서 하루에 만족할 생각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가벼운 영화를, 어린 시절 이유없이 좋아했던 그녀를 봤음에도 마음이 무거워 지는 것은 지난 세월이 적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동네 청년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 녀석은 담배를 피우러 갔고 다른 한 녀석은 화장실에 갔다. 난 주머니에 손을 넣고 핸드폰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동네 청년의 무리에 살짝 끼어 들었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개인적으로 난 대한극장을 좋아한다. 넓은 스크린이 주는 만족감도 만족감이지만 무엇보다도 이곳에는 많은 추억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좁은 에스컬레이터와 스타벅스, 바람이 시원한 발코니에 얽힌 수많은 시간들은 분명 영화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훼손되지 않은 순결한 상태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내 삶의 개인사적 측면에서 보자면 대한극장에서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를 보는 행동은 과거란 캔버스에 덧칠을 해버리는 것과 다름이 없다. 누구의 손도 타지 않았던 기억을 구겨버리는 행동이랄까? 아무튼 그랬다. 그리고 마음 속이 개운해짐을 느꼈다.

사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이하 세상의 중심)>는 열다섯에 보았던 <러브레터>만큼의 감동을 주지는 못했다. 사춘기의 가장자리에 접어든 나에게 <러브레터>는 시간이 지날수록 파문이 커져 가는 격랑과 같은 것이었는데 <세상의 중심>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까지 아무런 감흥이 없다.

시종 일관 밋밋한 평면 구상을 보고 있는 기분이랄까? 옆에서 하나가 작게 말한다. [인디영화 같았는데 해외 로케이션도 다녀왔네요] 정말 그랬다. <소품>의 섬세함은 좋았지만 <소품>을 <소품>답게 만드는 것은 보편적 공감이다. 우리처럼 쉽게 감동하지 않는 사람조차도 마음을 열게 만드는 그 무엇이 빠져 있었다.

하지만 눈시울이 붉어진 나의 지기에게는 남다른 감동으로 다가왔나 보다. 마음이 허전함으로 가득 채워진 나의 친구에게 남자 주인공의 토로는 [결코 자기 입으로 말할 수 없는 내심]을 표출하는 기능적 편익을 제공했다. 한번쯤은 이 녀석도 저렇게 말하고 싶었겠지. 나도 저렇게 비에 젖고, 다리가 풀린 몰골로 울먹이며 말하고 싶은 때가 있었으니 말이다.

이야기의 매력은 대리 만족에 있다는 말이 떠오른다. 이야기의 매력은 간결하지만 많은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편리성에 있다는 말도 떠오른다. 입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이야기에 공감을 표하는 끄덕임 하나만으로도 전달되는 메시지의 최종 수신자의 장기부재가 안타깝긴 하지만 말이다. 사랑은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수용하려 하는 어리석음이라던데… 우리는 끊임없이 어리석은 자가 되려 한다. 어제도 그랬고, 심지어는 영화를 보는 그 순간에도 그랬다.

그런데 <세상의 중심>에는 이상한 특징이 하나 있다. 영화의 완성도를 묻는다면 다양한 말이 나올 법한 영화인데 친구(male)가 보러 갈만한 영화라고 묻는다면 너의 십대 시절 로망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는 화답이 즉각적으로 튀어 나온다. 극중에서 그려내고 있는 여주인공 아키의 이미지는 청소년기 누구나 꿈꿔봤을 환상 그 자체다. 큰 키에 조각 같은 몸매, 길고 곧은 다리와 나를 위해 웃어주는 이름 모를 소녀의 이미지. 거기에 용기 없고 두서 없는 나를 위해서 먼저 내밀어주는 손.

필연적으로 죽음을 향해 달려갈 수 밖에 없는 플롯이지만 죽음에 담담한 것은 영화 전반부의 아름답고 환한 이미지에 압도당해 죽음을 지각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죽음이 진행되고 있는 순간에도 파리한 안색 위에 젊고 건강했던 시간이 겹치는 것은 우리네의 잔인한 심성 때문인지 의도된 효과인지 알 수가 없다.

단지 알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토록 오랫동안 주인공의 마음 속이 공허했던 이유에 대한 심정적 동의 하나뿐이다. 건강하고 아름다웠던 시간에 대한 이미지가 너무나 강렬해서 죽음이 장난처럼 느껴지는 것. 그래서 죽음이 끝마무리가 덜 된 것 같은 느낌. 여전히 존재하고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 같은 기분. 그래서 더욱 외롭고 공허한 빈곤의 악순환 단지 그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