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

실험 혹은 변절
[문학은 동시대의 역사와 사회상을 반영한다] 정확하게 위치해 있는 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리고 장예모의 [연인]을 보면서 다시 한번 되씹어 보게 된 문장이다. 사실 나에게는 장이모라는 발음보다는 장예모라는 음독이 더 익숙하다. 어린 시절 공리를 세계적인 스타로 데뷔시킨 붉은 수수밭도 봤고, 국두도 보았다. 조금 커서는 집으로 가는 길도 보았고, 영웅도 보았으며, 어제는 연인까지 보았다.

하지만 정작 흥미로운 것은 중국 사회가 변화한 만큼이나 달라진 그의 작품 세계에 있다. 천안문 사태 이전의 매우 중국적인 정서와 문화를 담고 있던 초기작부터, 천안문 사태 이후 말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미적거리는 작품까지,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차 작은 것에 몰두했던 시기와 기예를 다루는 공장에서 산업 시스템의 축이 된 현재의 모습까지 지난 20년 동안 장예모는 정말 다양한 모습을 작품으로 남겼다. 하지만 그렇다고 변화한 감독의 주관을 비난할 의도는 전혀 없다. 서구의 명장들이 단지 장예모 같은 상황을 겪지 못했기에 고고한 것이라고, 장예모의 변신은 이안을 통해서 이미 예고 된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사실 연인을 본 주변의 평가는 다양하다. [우리도 웃길 줄 알아요 하고 장이모가 대놓고 광고하고 있다]는 평가부터 시나리오가 엉망이다. [볼 거라고는 색감과 음악 밖에 없다]는 의견까지 정말 다채로움을 자랑한다. 하지만 기예를 다루는 공장에서 슬슬 벗어니기 시작한 자신의 역량을 헐리우드식 산업시스템에서 시험해 봤다는 평가가 제일 마음에 와 닿는다. 장예모 같은 거장 반열에 드는 사람이 몰라서 코메디를 만들었겠는가? 누구보다 정열적인 비극을 만들어낸 감독이 겨우 이 정도 수준에 만족하겠는가? 어쩌면 거대한 메이킹 시스템을 통해 감독은 한번쯤 탐구해보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과연 이런 시스템을 통해서 내가 만들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고(그런데 앞으로도 계속 이런 작품을 만든다는데 5백원 걸 용의가 있다)

장쯔이의 매력
사실 내가 가장 선명하게 기억하는 장쯔이의 이미지는 촌스럽고 어딘지 헛웃음이 나오게 만드는 [집으로 가는 길]의 장쯔이다. 샤요 메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막내 누이같았던 장쯔이의 초기작이 떠오른 것은 비단 우연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와호장룡이 스크린을 점령하던 그 시기에도 난 장쯔이를 대단한 배우라고, 혹은 매력있는 배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십이야를 보면서 장백지의 매력에 빠져있던 터라 장쯔이의 어딘지 중성적이고 앙칼진 모습이 싫었던 탓도 있다. [모름지기 미인이란 호소력 있는 표정이 있어야 하는데 장쯔이는 그것이 없어. 그래서 영화가 허무해] 하고 힐난하던 시기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브로셔의 소개가 아니더라고 장쯔이가 [연인]에서 선보인 춤은 정말 압권이었다. 어린 시절 수많은 고전을 읽으면서 상상해 보았던 그 시대의 안무가 구체적인 형태를 띄었기 때문이다.(사실 지금 사용하는 당송시대의 안무는 왠지 대장정 시대에나 추었을 법한 안무라서 어딘지 신뢰가 안갔다) 그리고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저 춤이 나를 위해 공연되고 있다는 상상이 조금 들긴했다. 기계 체조나 발레를 보면서 사내들이 한번쯤 해봤을 생각, 스포츠와 예술이란 이유로 경건한 자세로 관람하긴 하지만 내심에 지닌 몇분쯤의 딴 생각. 약간이지만 달아오른 사내의 옆얼굴이 보였다. 겉보기에는 심드렁한 관찰자의 표정이긴 하지만 속마음은 당신과 같다구. 그러니 놀란 토끼같은 표정짓지 말란 말이야 하고 조용히 독백해본다.

여전히 아름다운 금성무
9월 첫째주 신사동에서 논현동으로 걸어가며 지선, 하나와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났다. 금성무에게 전에는 안보이던 쌍꺼풀이 생겼노라고. 어딘지 느끼해 보인다던 녀석들의 말. 그리고 피곤하면 나타나는 내 쌍꺼풀때문에 쌍꺼풀이 무슨 죄냐고 항변했던 대화가 생각났다.(평소에는 외꺼풀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사내가 생각해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의 남자들이 가졌으면 좋겠다고 꿈꾸는 코와 입술, 턱이 화면을 가득 매웠다. 남자는 얼굴보다 실력으로 말하는 법이라고 배워온 나이지만 솔직히 부러웠다. 개개의 이목 구비는 무척이나 굵고 강인한데 저것이 저렇게 모이면 저렇게 부드럽단 말이지. 거울을 보면 난 시라노 벨게제락이 생각나는데. 코만큼은 그보다 잘생겼으니 사랑받을 자격은 충분하다고 날마다 2분쯤 생각하는 난 뭘까?

시놉시스에 대한 불만과 색감에 대한 찬탄
연인의 스포일러들을 읽고 있노라면 장쯔이의 질긴 생명과 금성무와 유덕화의 싸움이 한편의 코메디를 보는 것 같았다는 내용과 접하게 된다. 솔직하게 어이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장쯔이가 비도 한번에 죽었다면 와호장룡의 리무바이의 죽음만큼이나 허무하다는 소리를 했을 것 같다. 게다가 남겨진 둘이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할 개연성도 떨어지고, 심판인 장쯔이가 죽은 마당에 결론이 분명하게 날 것 같지도 않다. 비록 억지스럽지만 장쯔이가 불굴의 투혼을 발휘해 난 금성무가 더 좋아하고 몸으로 표현하는 쪽이 코메디라는 비웃음을 사는 한이 있더라도 영화 전체의 결말로서는 나은 것이 아닐까?

사실 요즘 영화의 고질병은 끝맺음이 흐지부지 하다는 사실이다. 설정과 발단은 괜찮은데 결말가지 끌고가는 힘이 부족하다. 그리고 이런 부족함을 채우는 것은 화려한 볼거리와 음악이다. 연인도 이런 범주에서 예외는 아닌지 영화 후반부의 빈곤함을 장예모 특유의 색감과 음악으로 채운다. 하지만 장예모의 색은 언제 봐도 멋지다는 생각을 한다. 무채색에 익숙해진 현대인에게(아니 나에게) 그의 영화는 산과 들을 찾지 않아도, 도심의 극장에서도 쉽게 즐길 수 있는 색채의 현란함을 전해준다. 시놉시스가 엉망이어도, 장예모의 명성에 걸맞지 않는 매스 프로덕트임에도 연인을 본 2시간이 지루하지 않은 것은 이런 까닭이 아닐까?

the Terminal

친구가 아닌 주변인들로부터 내가 제일 자주 듣는 소리는 아직 어리다는 말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하는 법인데, 되려 나이를 먹을수록 경험의 상대적 범위가 좁아진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경험의 범위가 좁은 만큼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들도 많아진다. 때로는 [건전한 상식]을 가졌다고 믿어왔던 내가 외계인으로 오인 받는 사태가 심심치 않게 벌어지기도 한다.

사실 Terminal의 오프닝과 함께 내 머리를 맴돌기 시작한 것은 [또 다시 외계인이 되어버렸구나]란 생각이었다. 포레스트 검프에서 보다는 조금 더 정상적이지만 여전히 Abnormal인 톰 행크스와 개연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캐서린 제타 존스의 캐릭터, 억지스럽기 짝이 없는 에피소드들. 스필버그란 이름 아래 이해를 강요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코엔 형제가 만들었다면 조금 더 엽기적이긴 하지만 최소한의 인간미는 남아있는 봐줄만한 영화가 되었을 거란 생각을 했다. 알란 파커를 싫어하지만 억지스러운 에피소드를 강조하려면 차라리 화려한 음악과 군무가 담긴 뮤지컬 영화가 나을 거란 생각도 했다. 사실을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두시간 내내 머리를 줄곧 맴돌았던 생각은 꽤나 불쾌한 영화라는 확신 하나뿐이었다.

전공이 전공인만큼 난 관객 세그멘테이션과 타켓팅에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다. 비록 스필버그가 의도한 세그멘테이션과 타켓팅에 내가 해당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리 아쉬울 것은 없다. 하지만 [터미널]은 바보스러울 정도의 착함을 통해서 스필버그가 의도한 세그멘테이션과 타켓팅에서 벗어난 나를 Abnormal한 사람으로 몰고 간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짜 인생이란 저런 질박한 순순함이라고, 어리숙하지만 어느 비범한 사람 못지 않은 카리스마를 내품는 톰 행크스야말로 우리 안의 숨겨진(혹은 우리가 꺼내야 하는) 인간상이라고 스필버그는 영화 전편을 통해서 집요하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난 이런 방식의 스필버그가 무척이나 당혹스럽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가운데 하나인 [태양의 제국]를 만든 스필버그는 지금껏 관객에게 이해를 강요했던 적이 없다. 단지 자신의 생각을 조용하게 읊조렸을 뿐, 그의 영화에는 늘 자신의 이해말고도 관객이 스스로의 생각을 풀어놓을 한적한 방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가 생각하는 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개종을 하던지, 아니면 인간미 없는 냉혈한으로 전락하던지 두 방법 밖에 없다. 두가지 모두 싫은 나로서는 꽤나 불쾌한 기분이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땅콩캔 속에 담긴 명인들의 서명이 무슨 이유에서 째즈인지 잘 모르겠다. 재즈는 뉴욕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명인들은 서방 세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린 시절 [러시아 하우스]를 보면서 유쾌했던 이유는 페레스트로이카 시대의 흥겨운 재즈연주 때문이었다. 신문 속 사진 한장을 재즈의 전부로 알고 헌신하는 한 남자와 그 남자를 위해 뉴욕에 가고 싶어하는 또 다른 남자를 인정하고 빠져들기에는 심리적 저지선이 너무 강하다. 게다가 거기에 감동하는 한 여자까지 이해하려니 머리속은 복잡하고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참. 그런데 이해못할 사실이 하나 더 있다. Life is waiting이란 문구와 터미널이란 제목. 2시간이란 시간을 투자했음에도 이렇게 헤매는 것을 보면 내가 진짜 외계인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Everyone says I love you.

사람에게는 [해마다] 하는 일이 있는 것 같다. 해마다 옛 애인에게 안부를 묻는 자상함 반, 집요함 반이 섞인 이상한 버릇을 가진 사람도 있고, 해마다 똑 같은 곳을 여행하는 사람도, 해마다 같은 선물을 같은 사람에게 선사하는 사람도 있다. 나 역시 이런 버릇에서 예외는 아니어서 해마다 같은 책을 읽고, 같은 영화를 본다.

에밀리 브론테의 웨더링 하이츠,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 게팅 메일리의 아르마다, 레이 황의 1587년 아무 일도 없었던 해, 완독을 목표로 하지만 해마다 2/3지점에서 무너지고 마는 율리시즈와 유리알 유희, 그리고 이런 저런 이유로 꼭 보게 되는 우디 앨런의 Everyone say I Love you…

우디 앨런 그리고 영화 따라 하기
한참 영화에 매료되던 시기에는, 평범한 소비자가 아닌 비평가가 되고 싶던 시기의 나에게 우디 앨런이란 이름은 괴짜란 말의 동의어였다. 뉴욕 시리즈에서 마이티 아프로티테에 이르는 방대한 작품에서 보여준 우디 앨런만의 비틀림과 위트는 그것을 소비하는 나까지 지적이고 위트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라고 착각하게 만들곤 했다. 그를 보고 있노라면 어딘지 또래와 다르다는 만족감에 흐뭇했던 것 같다. (물론 실제의 내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먼 훗날이었다)

말러의 4번 교향곡을 좋아하게 된 것도, 틴토레토의 유화를 좋아하게 된 것도, 베니스에서의 사랑을 꿈꾸게 만든 것도 전부 이 영화 탓이다. 겉은 허름하지만 속은 화려하게 꾸며진 안락한 다락방에서 타이프 라이터로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 생각한 것도, 이성의 어깨 선과 쇄골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전부 이 영화를 보고 난 다음이다.

유쾌한 소극
Everyone says l Love you(이하 에브리원)은 뮤지컬 영화다. 노튼과 줄리아 로버츠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영화는, 가수 뺨치는 골디 혼의 노래 실력을 감상할 수 있는 영화는 에브리원이 유일하다. 게다가 최근 십년 동안 제작된 영화 가운데 에브리원만큼 능숙한 솜씨로 발랄하게 빚어낸 뮤지컬 영화는 전무하다.

생각보다 무겁고, 진지한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행복한 느낌이 드는 것은 아름다운 음악과 재기발랄 때문이라 말하는 친구의 말을 하나 더 인용하자면 에브리원이 재미있는 이유는 단 한 순간도 중심을 잃지 않는 위트 때문이라 한다. 똑 같은 장면을 보고 있음에도 볼 때마다 다른 위트를 발견하는 것은 위트는 해석자에 따라 깊이가 달라보이는 신기한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에브리원은 영화보다 에드워드 노튼이 드류 베리모어에게 한 청혼 시퀸스로 더 유명한 영화다.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디저트에 반지를 넣어 청혼하는 방법은 이 영화가 나온 96년 이후 영원한 고전(혹은 교범)이 되었으며, 각종 시트콤에서 단골로 우려먹는 소재가 되었다. 하지만 단지 꽤나 괜찮은 청혼법으로 에브리원을 설명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다.

이상한 가족, 이상한 사람들, 그래도 모두 사랑을 말한다.
에브리원에 나오는 가족은 어딘지 비현실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다. 친구의 아내를 사랑하고 결혼까지 한 남자, 자신보다 더 아내를 사랑하는 친구를 위해 아내를 포기한 남자, 남편의 친구와 부부가 되고, 전 남편을 친구로 거느린 여자. 그리고 이들의 자녀들로 구성된 하나의 대가족,

부자연스럽고 부담스러워야 정상일 텐데 이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설정 만으로도 영화 감이다) 이들은 되려 밉살 맞을 정도로 행복하고 서로를 사랑한다. 어쩌면 사랑이란 단어에 격식과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진짜 사랑을 왜곡시키는 것은 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에도 지켜야 할 룰이 있으며 격에 맞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야말로 사랑을 말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 아닐까? 나는 언제쯤에야 사랑은 사랑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강도나 지속성, 합리성 따위는 무시해도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