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트로이와 일리아드1

트로이를 본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하나같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원전과 다르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에릭 바나가 멋지다는 이야기다. 후자야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위협하는 위험 요소니까 그냥 가볍게 넘어가 주고 도대체 트로이가 원전과 얼마나 다르다는 것인지 살펴보자.

트로이의 크레딧에는 분명히 원작을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표시하고 있다. 일단 우리가 트로이로 알고 있는 도시의 그리스식 표기법이 일리아드임을 밝혀 둔다. 왜 호메로스가 그리스 연합군과 트로이 사이의 전쟁를 노래한 서사시에 난데 없이 일리아드란 제목을 붙였는지 궁금해 있는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띄기 때문이다.

아무튼 일리아드는 10년 가까이 계속되었던 전쟁가운데 딱 49일 동안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흔히 상상하는 것들과 다르게 일리아드에는 헬레네가 파리스를 따라 도망치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일리아드는 아폴론을 섬기는 신관의 딸을 전리품 삼은 그리스신에 대한 신의 징벌로 원정군에 역병이 도는 장면으로 시작되어 파트로클로스의 장례식으로 대단원을 마무리 짓는다.

다시 말해 영화 트로이에 나오는 그리스군의 상륙전이나 그 유명한 트로이의 목마는 원전으로 불리는 일리아드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특히나 트로이의 목마는 일리아드에서는 그 냄새도 피우지 않는다. 조금 더 상황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우리가 원전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호머의 일리아드가 아니라 토마스 불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로 보여진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리아드라고 착각했던 그리스 로마 신화를 토대로 볼 때 영화 트로이는 얼마나 다른 것일까?

1. 아가멤논과 아킬레스의 관계

영화 트로이에서는 아킬레스가 아가멤논에게 봉사하는 무사로 묘사 되지만 아킬레스의 아버지 펠레우스는 프티아의 왕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라리사는 프티아의 수도이며 오늘날의 그리스 북부 지방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아가멤논의 근거지였던 미케네와는 상당히 거리를 두고 있다. 게다가 지리상으로는 라리사와 트로이가 더 가깝다. 라리사의 왕자인 아킬레스가 떠돌이 용병처럼 아가멤논에게 불려다녔다는 설정은 아가멤논과 아킬레스의 극중 대립각을 강조하기 위한 시나리오 에디터의 각색으로 보인다.

2. 아가멤논과 네스토르

메넬라오스가 아가멤논에게 트로이를 태워버리자는 제안을 한 다음, 아가멤논이 전략을 논의하는 부관으로 나온 사람이 네스토르다. 물론 한글 번역에는 단 한번도 이름이 등장하지 않았지만 극중 대사 속에서는 네스토르라는 이름으로 불려진다.그리스 연합군 가운데 가장 나이 많은 연장자였으며 게렌의 기사(아직까지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밝혀지지 않았다) 혹은 고귀한 네스토르로 불렸던 이 무사의 고향은 필로스 섬으로 알려져 있다. 한 나라의 군주인 네스토르가 아가멤논의 궁정에서 참모로 일하고 있다는 설정은 아이러니다. 하지만 트로이의 주요 등장 인물 가운데 가장 신중하고 사려깊은 인물로 알려진 네스토르는 서구 문화권에서는 상당히 인기 좋은 인물이다.

3. 오딧세우스와 아킬레스, 그리고 참전의 계기

영화에서는 오딧세우스가 외딴 폐허에서 검술 연습중인 아킬레스에게 참전을 종용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신화에서는 라리사의 궁전에 있던 아킬레스와 파트로클레스는 전쟁에 종군하지 않기 위해 여사제들만 있던 외딴 신전으로 도피한 것으로 나온다. 이것은 아킬레스가 트로이 전쟁에 종군하게 되면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는 신탁의 예언에 따라 바다의 여신인 어머니 테티스가 참전을 금지했기 때문. 그런데 영화에서는 되려 테티스가 이왕 죽는 인생 멋지게 살다 죽으라고 아킬레스를 종용하는 것으로 나온다.

한편 영화에서 참전을 정치적인 이유라고 말하는 오딧세우스 역시 신화에서는 종군을 피하기 위해 그다운 꼼수를 부리는 것으로 나온다. 페넬로페와의 신혼 재미에 빠져있던 전쟁에 빠지려고 미친 연기를 하고 있었는데 아들인 텔레마코스 때문에 진짜 미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들키게 되고 울며 겨자 먹기로 참전하게 된다. 하지만 일단 종군하기로 결심한 오딧세우스는 당대 최고의 쌈꾼인 아킬레스를 동참시켜 안전을 확보하려 한다.(오딧세우스가 20년만에 귀향하는 것은 다 이런 좀스런 성격 때문에 저주를 받아서 일 것이라고 생각함)아무튼 아킬레스를 참전시키기 위해 상인으로 변장해 여사제들이 득실거리는 신전을 방문한 오딧세우스는 멋진 검을 상품으로 내놓음으로써 아킬레스의 실체를 밝혀낸다. 실체가 밝혀진 아킬레스는 결국 참전을 약속하게 되고 이로써 그리스 연합군의 진용이 갖추어지게 된다.

다음 포스트에 계속!

Before Sunset#1

애플의 트레일러 사이트에 들렸다가 비포 선셋이란 제목의 트레일러를 발견했다. 혹 비포 선라이즈의 후속편은 아닐까? 십대 초반의 난 빈에만 가면 누구나 줄리 델피같은 미인과 낭만적인 데이트를 나눌 수 있는 것으로 알았다.(십대 후반의 누이들은 반대 였다고 한다. 빈에만 가면 누구나 에단 호크같은 남자와 낭만적인 데이트를 나눌 수 있을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빈에 가보기는 커녕 한국에서의 낭만적인 데이트도 그다지 기억나지 않는 이십대 중반이 되어 버렸다.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기차역에서 한 약속에 대해서는 항상 논란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 친구들의 상당수는 둘이 만났으리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했고(물론 영화에 그런 장면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내 누이들은 둘이 결국 만나지 못했을 거라는 전망을 했다. 아주 가끔 케이블 텔레비젼에서 비포 선라이즈를 방영하고 있을 즈음에는 하던 일을 멈추고 분위기에 취했던 것 같다. 빈에서의 하룻밤이라는 멋진 소재와 아담한 길을 거닐며 대화를 나누는 그들이 너무 아름다워 보였기 때문이다. 여행지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남녀가 첫눈에 반하는 그런 사랑에 대한 욕구를 마음 속 깊숙한 곳에 자리잡게 한 영화가 바로 비포 선라이즈가 아니었을까?

결론적으로 비포 선셋은 비포 선라이즈의 후속편이 맞다. 그리고 이번에는 오스트리아의 빈이 아니라 프랑스의 파리가 배경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비포 선라이즈의 두 주인공이 약속한 1년 후의 만남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9년 후의 만남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야기다.(여기에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나와 내 친구들의 예상은 빗나갔다. 역시 여자들이란 매우 뛰어난 직감을 가진 존재라니까…) 십대 소녀들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던 에단 호크는 멋진 아저씨가 되었고 화이트에서 소녀와 여자의 미묘한 경계를 보여주었던 줄리 델피는 드문 드문 주름이 눈에 띄는 진짜 여자가 되어 버렸다.

사실 시놉시스는 따로 읽어 보지 않았다. 보기로 마음 먹은 영화의 리뷰를 읽는다던지 시놉시스를 보는 행동은 자칫 재미난 영화를 재미없게 만들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개봉은 7월 2일. 이 때에는 누군가에게 애걸하는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늑대같은 사내 녀석들 대신에 우아한 처자와 함께 영화를 보리라. 다른 영화는 몰라도 비포 선셋까지 로맨틱 코메디를 좋아하는 나의 지기들과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것 까지 같이 보게 되면 정말 우리는 무능한 이십대가 되어 버릴테니까..

Modified 2023. 5. 19

비포 선라이즈의 배경 빈에는 두 번 가봤다. 첫 방문에서 줄리 델피 같은 기차에서 충동적으로 내린 아가씨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쇤브룬 궁전 투어 도중에 만난 ‘태양의 서커스’에서 일한다던 중국계 캐나다 아가씨와는 오붓한 산책은 해봤다. 두 번째 방문은 아내를 로마에서 만나기 위한 징검다리에 불과해서 벨베데레 궁전의 잔디밭 벤치에서 아내와 주고받던 텍스트 메시지만 기억난다.

비포 선셋은 두 번 본 것 같고, 두 사람의 대화보다는 맨 마지막 줄리 델피의 노래가 기억난다. 이후 두 사람의 삶에 대해서 아내와 이야기했던 것 같지만 비포 미드나잇이 나오며 우리는 선셋 이후 두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 두 사람의 여정을 싫어도 알게 되었다. 마흔셋이 되어 이 영화에 대해 반추하자면 그 시절, 그 감수성의 영화로는 나무란 바 없지만 현실적인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관계라는 측면에서 보아도, 개연성으로 보아도. 지금 보자면 이 영화가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판타지는 그 시대 기준으로 잘생긴 남자와의 로맨스였지 삶은 아니었던 것 같다.

Jersey Girl!

Stealing Beauty…그 후로 9년
일상을 살다 보면 어느 순간 나이를 먹었음을 감지하는 순간이 있다. 너영민, 사기꾼과 Jersey Girl를 보기 위해 극장에 앉아 있던 순간이 그랬다. 우리가 알게 된지 어느 사이 일곱해가 지났다. 어떻게 보면 일곱해란 시간은 매우 긴 시간임이 틀림없다. 고2 여름 야자를 튀고 보았던 아마겟돈의 주인공들이 다시 연인으로 나온 영화를 보고 있음에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리브 타일러에게 처음 매혹된 시기는 16살 때로 기억된다. Empire Record도 보았고, 그녀를 위한 영화로 알려진 Stealing Beauty도 보았다. That thing you do와 Silence Fall도 보았으며 악의 꽃도 보았다. 얼마 전 지방시 향수 광고의 모델로 캐스팅된 리브 타일러를 보면서 내가 받은 느낌이 그녀가 나와 같은 세대라는 생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이내 놀라게 된다. 내가 나이를 먹은 것인지. 아니면 세상이 멈춰 있던 것인지 가늠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벤 애플렉도 마찬가지 인 것 같다. 굿월헌팅으로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하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97년 봄의 일이란다. 17살에는 굿월헌팅에 언급된 oral sex가 우리 사이에서 던져지던 가장 심한 sexual issue였는데 이제는 그런 것으로는 놀라지도 않는다.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그리고 이제는 넓게 벌어진 리브 타일러의 어깨를 보면서 되려 편안함을 느낀다.

Comfortable
Jersey Girl은 편안한 영화다. 갈등 구조가 복잡하지도 않고, 음악이 번잡하지도 않으며 고민 또한 길지 않다. 물론 주인공 커티가 태어나고 올리가 뉴저지의 시골 청소부가 되기까지의 런닝 타임이 조금 길긴 하지만 그것도 나름대로의 재미가 있다.(런닝 타임의 1/3이다) 게다가 음악 또한 듣기 편하다. 영화를 압도하는 OST Number는 없지만 시종 일관 적절한 빠르기와 멜로디로 집중을 돕는다. 강력한 클라이맥스는 없지만 클라이맥스가 없어도 충분히 재미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한참이나 할말이 없어진다. 가족에 관하여, 과연 내가 저 상황에서 내 삶을 포기할 수 있을까? 죽은 아내를 몇 년이나 추억할 수 있을까? 자식이 내 삶에 주어진 기회를 포기할 정도로 중요한 것일까? 아직 경험해 보지 않은 상황을 미루어 짐작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만약 그런 상황이 나에게 닥쳐 온다면 어떻게 할까? 순진하진 않지만 냉혹하지도 않은 우리에게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뛰어넘는 난제다…

Thinkin
한참 뒤에 사기꾼이 한마디를 한다. ‘저지걸 재밌었어. 그런데 미국 영화는 상당히 가족 중심적이란 말이야.’ 우리와 가족 개념이 많이 달라서 그런 것 같다고 궁색한 변명을 해본다. 우리의 가족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me’와 같은 개념이라서 그런다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욕망의 범위는 넓어져 가고, 포기할 수 없다 생각되는 것들이 많아진다. 예전에는 기꺼이 손에서 놓을 수 있다 믿었던 많은 것들을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강하게 붙잡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어쩌면 나 역시 가진 것이 많은 자에 속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포기할 줄 모르는 나에게 대한 두려움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러면서도 더 많이 욕망하고 더 많이 가지고 싶어한다.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의 뒷모습은 아름답다고 한다. 물론 이미지를 고려해야 할 장소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마음 속에서는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의 뒷모습은 허망한 것이라 말한다.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할 수 밖에 없는 것일 테지 하고 생각하는 내가 무섭다. 너무 경쟁에 물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잠시 한다. 그리고 지는 것보다는 이기는 편이 남는 장사란 평범한 진리가 삶을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음을 인식한다.

But…
재밌는 영화, 편안한 영화지만, 사고의 음습함은 주어진 상황을 전혀 새롭게 해석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울한 이야기보다는 행복한 꿈이 좋다. 프렌즈에서 로스가 청혼하는 느낌이 좋다고 할 때 강한 긍정의 고개 짓을 하는 것처럼. 암울한 나지만 경쟁에 물들대로 물든 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이야기가 좋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가 이제는 나의 것이 되었으면 하고 욕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