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September 2013

1.
영화 Two Mothers의 원작인 도리스 레싱의 Grandmothers를 읽는 중이다. 때로 내가 드라마 작가나 영화 감독있었다면 좋았을 텐데라고 느끼게 만드는 소설이 있다. 레싱의 그랜드마더즈로 바로 그런 소설이다.

소재면에서는 ‘졸업’은 우습게 볼 수준이고, ‘아름다운 청춘’의 파격도 놀랍지 않다. 문제는 이런 파격적인 소재를 우울하고 불쾌하게 묘사하거나 미화하는 것 없이도 놀랄만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작가의 역량이다. 이제 몇페이지 남지 않았지만 담담하게 진행되는 이야기는 횡설수설하지 않아서 좋다. 도리스 레싱은 인물들의 행동에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지도, 속마음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우리는 처음 로즈와 관계하던 이안의 마음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이안을 받아들인 로즈의 선택이 일회성이 아니라 계속되었던 이유를 어렴풋하게 예상만 할 수 있을 뿐 판단을 내리기에는 정보가 부족하다. 릴에 이르러서는 왜 그녀가 톰을 받아들였는지는 현재 읽은 부분까지는 신만 알 것이고, 그녀가 톰을 사랑한 방식을 엿볼 수는 있으나 그들의 사랑이 어떤 것이었는지 추측하기조차 어렵다.

디테일을 사랑하는 내가 이 소설에 이렇게 열광하는 이유는 단순한 이야기가 상상하는 범위에 따라 다양한 내러티브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레싱은 우리에게 이야기의 얼개를 제공할 뿐이고 채색과 명암은 순수하게 독자의 몫으로 남겨 놓았다. 혼자만의 상상력으로 채워도 좋고, 그것을 누군가와 나누어도 좋을 정도로.

결국 소설을 다 읽어가는 지금. 내가 상상한 소설 속 현실의 문제를 two mothers의 감독이 어떤 식으로 배치하고, 또 어떤 기분으로 해석했는지 궁금해 죽겠다. 소설도 좋지만 영화가 있어 더욱 행복한 경우랄까? 나오미 와츠가 참 배역에 잘 어울리는 배우라는 것은 별론으로 하고…

2.
이렇듯 즐겁게 썼으나 서른 셋은 쉽지 않다. 현실적인 문제들이 나를 옥죄이고 있고, 아마도 영원히 옥죄일 것 같아 힘들고 서럽다. 삶은 항상 ‘왜 사냐면 그냥 웃지요’이다. 아내 품에서 보내는 짧은 저녁만이 나의 위안이 된다. 휴~

23 August 2013

1.
DG 111시리즈를 사면서 얻게 된 가장 큰 수확은 분덜리히의 목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그 전까지 난 ‘시인의 사랑’은 만큼은 피셔-디스카우보다 보스트리지의 목소리가 더 낫다고 생각했는데 분덜리히의 목소리는 보스트리지가 가진 호소력을 뛰어넘어 사람을 눈물짓게 만든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이런 목소리를 음반으로 밖에 들을 수 없다는 사실 서른 다섯에 요절한 그 이기에 실제로 목소리를 들을 기회가 없다는 것은 너무 아쉽다. 스틱스강의 하우스보트처럼 누군가 스틱스강의 오케스트라를 만들면 어떨까?

2.
분덜리히에 이어 고전 중의 고전인 프레니와 게다의 라보엠을 듣고 있다. 내가 본 라보엠은 총 2번인데 한 번은 옥스포드, 한 번은 예술의 전당. 눈을 감고 있자니 2006년 늦여름 옥스퍼드 오페라 극장의 웅성거림.내 마음을 아름답게 적시던 웨일즈 내셔널 오페라 컴퍼니의 연기가 떠오른다. 당시에는 미미가 너무 늦게 죽는다고 툴툴거렸으나 시간이 지나고 보니 참 아름다운 추억이다.

3.
99년 이후 더 이상 우디 앨런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지만 지난 번 영화 to Rome with love에서 욕조에서만 노래를 부르는 앨런의 사돈 에피소드는 작위적이지만 사람의 마음 속에 담긴 내밀한 꿈을 이끌어내는 미묘한 것이었다. 난 욕실에서조차 그 남자처럼 노래를 부리지 못한 것을 제외하면 누구가 멋진 음악을 들으 때 마음에 품게 되는 나도 저렇게 부르고 싶다는 생각을 생각보다 괜찮게 풀어냈기 때문이다.

4.
아이를 낳고, 아이가 자라면
아이와 함께 오페라를 보고 싶다.
아이와 함께 발레도 보고 싶고,
토월 극장에서 그리스 희극도 함께 보고 싶다.

아이와 윤지와 함께
낯선 도시를 걸으며 대가들의 명작들을 찾아 순례를 떠나는
생각을 하고 있노라면 왜 이렇게 행복한지.

MBA도, IB뱅커도 아니지만
젊은 시절 꿈꾸었던 일과는 지독하게 먼 곳에서
내가 잘하는 것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이곳에서
나이를 먹고 있지만,

아내를 제외하면 누구에게도
내 안에 담긴 것을 보여주지 않은 채
느린 속도로 시들고 있지만

윤지와 아이와 함께하는
미래를 상상하고 있노라면
마음이 터질 것처럼 부푼다.

19 May 2013

1.
아이폰 번들 이어폰을 사용하다 오랜만에 곱게 에이징된 B&O의 A8를 귀에 꼽았다. 아 이 이어피스가 이렇게 좋았나 싶을 정도로 새로운 소리가 나를 채운다. 아름다움에 잠시 마음이 먹먹해질 정도로 섬세하다. 마치 내 앞에서 디트리히가 겨울 나그네를 부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정도로…

때로 평범하고, 그만그만한 것들이 꼭 필요하단 생각을 한다. 평범한 것들이 있어야 좋은 것들이 좋은 점을 가졌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설명은 근래 들어 잡서를 즐겨 읽는 내 독서 양태에도 좋은 설명이 될 듯 싶다. 이미 아내가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언급한 것처럼 평범한 글을 읽다가 대가의 걸작을 만나면 아름다운 문장과 구성에 홀딱 빠져버리게 된다. 왜 대가가 대가인지, 좋은 글이 얼마나 황홀한 기쁨을 주는지 마음 속 깊게 깨닫게 해준다. 뭐 결국 그래서 잡서를 읽는다는 뭔가 비논리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되지만. 결론은 마음으로만 생각하자.

2.
솔직히 요즘의 생활어로 고백하자면 아내는 나에게 영업당한 측면이 없지 않다. 아내에게 츠바이크의 아름다움을 깨우친 것은 누가 뭐래도 나라고 자부하고, 아내가 촛대의 전설의 결말을 이야기하고 있자면 우리 부부는 서로에게 사랑스러운 미소를 보내준다. 그리고 난 나도 모르게 십대 후반의 소년으로 돌아가 그 얇은 소설을 지역서점에 읽고 있다. 그 시절 난 장 자크 피슈테르의 표절을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실제의 삶은 그보다 더 낫다. 우리에게는 표절보다 더 나은 촛대의 전설이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아내는 내게 리히테르를 소개해줬다.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리그의 서정소곡을 처음 들었던 순간의 두근거림은 지금도 늘 함께한다. 항상 사랑스럽지만 이 사람이 내 아내고, 내 영혼이다는 생각을 할때면 늘 서정소곡의 아리에타가 머릿속에서 울린다. 그 순간은 솔직하게 영혼이 울리 정도로 행복하다. 아내 덕분인지, 리히테르 덕분이지 늘 살짝 눈가가 젖어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3.
연휴 동안 바벨-17을 읽고, 하트 오브 아이언의 세번째 시리즈를 했으며, 밀린 드라마를 보았다. 연휴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이 즈음 난 크래프트 비어가 마시고 싶어 안달이 났는데 사랑스런 연인인자, 술친구인 아내는 강제금주에 들어갔다.